산책하는 말들

13. 산책하는 말들 / 시작

새해는 원래 구정 지나서부터

2025.01.17 | 조회 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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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13. 산책하는 말들 / 시작

 

새해는 원래 구정 지나서부터

 

글을 쓰는 지금이 오후 7시. 원래대로라면 나는 강릉의 어느 오마카세 집에서 신나게 마시고 있을 것이다. '강릉으로 당일치기 여행 가자!' 무려 3주 전에 지인 둘과 함께 미리 정해둔 약속이었다. 오마카세를 사주고 싶다는 맏언니 격의 지인의 제안에 우리 둘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는 첫째, 아이들이 좀 크긴 했어도 바다를 보러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은 가 본 적이 없었다. 둘째, 술은 좋아하면서 술 약속은 잘 없는 사람이라(혼자 일하고, 외출은 대부분 아이와 함께 하는 걸 즐기는 등의 이유로) 아직 한 번도 오마카세를 가 본 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했다. 마음껏 마시라고 안주가 종류별로 나오는 곳이라니. 내 상상 속 주당의 천국 같은 모습이랄까. 마지막은 애늙은이 스타일인 나는 학교나 사회에서 주로 언니 포지션이 편했기 때문에 주변에 딱히 언니라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여행의 동반자 둘이 모두 언니! 게다가 이렇게 셋이 가는 여행은 처음! '언니'와 '여행'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내 생에 처음이라 이름 붙일만한 경험이었다. 그러니 이번 강릉 여행은 여러모로 기억될만한 시도였다.

좋아하는 언니 둘과 강릉 당일치기 오마카세라니. 뭔가 느낌 좋은 단어들의 조합을 완성된 문장 같은 여행. 일찌감치 기차표를 예매하고 핸드폰 스케줄러는 물론 가족 모두가 볼 수 있게 주방 달력에도 표시해 두었다. 남편에게도 여러 번 얘기했다. 14일 화요일은 일찍 와야 해. 나 그날 늦게 늘어올 거야. 다음 주 화요일 알지? 나 강릉 가는 날. 

 

이 완벽한 여행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건 9일부터였다. 어떤 전조증상도 없이 갑자기 노란 콧물이 쏟아졌다. 예전에 어디서 주워듣기로 노란 콧물은 약국약으로 안 된다고 하던데, 병원 안 가고 버텨서 병 키우기 달인인 나는 이번만큼은 바로 행동하기로 했다. 감기든 독감이든 뭐든 간에 심해지기 전에 싹을 자르리라. 허무하게도 의사에게 약국약 먹으면 되는 걸 왜 여기 왔냐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다음날 거 보란 듯이 미열이 시작됐다. 기운이 없고 잠이 쏟아졌다. 다음 날은 먹는 것도 없는데 체기가 느껴져 이틀을 거의 굶었다. 

딱히 병명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내 몸이 지금 평소의 리듬을 잃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작가와의 만남 행사와 하나와 약속한 눈썰매장 일정은 겨우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는 컨디션 회복에 집중했다. 오로지 강릉에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리고 바로 어제, 컨디션이 거의 90% 정도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다시 입맛도 돌아왔고, 기운이 없어 하루에 몇 번씩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급하게 때려먹은 비타 500과 오로나민씨 덕분인가.

하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괜찮아졌다고 강릉에 갔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두 사람에게 민폐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두 사람 실컷 마시라며 썩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차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착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괜찮다 하더라도 지하철과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길을 버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하루 전에는 기차표를 취소해야 하기에 핸드폰을 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그런 날 알았다는 듯, 며칠 전 내 얼굴을 보았던 언니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쉬어도 된다는 메시지가 보내왔다.

 

그리고 오늘. 나는 두 사람이 올리는 스토리를 보며 어머, 저긴 눈이 왔네. 두 사람이 커피 한 잔씩 들고 기차를 탔네. 강릉역에 내려 동네 구경 하고 있구나. 오마카세 가기 전에는 카페에 갔고, 오늘의 주종은 막걸리네. 두 사람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카톡에서 징징거리는 중이다.

바다야 12월에도 봤으니 아쉬울 것 없지만, 오마카세야 나중에라도 갈 수 있지만. 건강하지 않은 몸이 문제가 되어 적당한 때에 딱 맞는 사람들과 홀연히 떠날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웠다. 다시 약속을 잡는다 한들 그런 즐거움은 자연스럽게 피어나야 하는 거니까.

원래의 나라면 1월을 마라톤의 시작 총성처럼 여겼을 것이다. 흡족할 만한 기록을 세우고 무사히 완주하리라 마음먹고 산뜻하고 가볍게 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뭐든 시작하길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1월은 벅찬 계획으로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속이 메스꺼운 사람에게 1월은 그저 여러 날 중에 특별할 것 없는 하루 일뿐. 열이 나고 눈꺼풀이 무거운 사람에게는 하던 것을 멈추고 없는 셈 치는 날일 뿐이다. 

내 몸을 돌보고 살피느라 1월을 다 써서 나는 이미 출발한 사람들 뒤에서 다시 나만의 스타트 라인을 긋는 마음으로 2월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 원래 새해는 구정부터지. 이번 달은 몸 잘 추스르고, 구정에 마음껏 먹고, 푹 쉰 다음에 다시 2월이라는 시작 점에 가뿐한 컨디션으로 서자.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지.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은 지난 12월에서 끌어올 참이다.

 


 

14일에 쓰던 글을 17일에 다듬어 보냅니다. 구독자님은 어떤 모습으로 1월을 보내고 계신가요? 아직 출발 전이라면 뒤늦게 그은 제 스타트 라인에 함께 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25. 1. 17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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