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관련 전공을 하신 분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이름으로 소쉬르가 있습니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우리가 단어로 어떤 대상을 가리킬 때, 꼭 그런 단어를 써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나무는 그냥 나무고 바람은 그냥 바람이지, 나무를 나무라고 불러야 할 이유, 바람을 바람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입니다.
대단한 이론을 덧붙이지 않아도 사실 이 얘기는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에 반례가 될 수도 있는 발견이 있습니다. 바로 '부바/키키 효과'입니다.
두 도형 중 하나의 이름은 '부바', 하나의 이름은 '키키'입니다. 어느 쪽이 부바이고 어느 쪽이 키키일까요?
왼쪽이 키키, 오른쪽이 부바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타밀어 화자나 미국의 영어 화자 대학생들의 95%~98% 또한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평균 88% 정도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문자 체계가 없는 언어 사용자나 어린이,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에게까지도 둥글둥글한 이미지에 부바를, 뾰족뾰족한 이미지에 키키를 대입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다만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의 경우 경향이 더 약한 편입니다. 자폐인의 경우에는 56% 정도의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영상을 찍어 보았을 때, 두 물체에 이름을 반대로 붙이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전두엽이 강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둥글둥글한 그림이 키키고 뾰족뾰족한 그림이 부바라고 생각하려면 더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부바 소리를 낼 때 입이 둥근 모양을 만들고, 키키 소리를 낼 때 더 각진 모양을 만들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렇게 인지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자면, 어쩌면 인류는 이런 식으로 첫 단어들을 만들어 갔을지도 모릅니다.
영어 화자들에게 일본어 단어 몇 쌍을 제시한 실험에서도 영어 화자들은 69%의 확률로 두 단어를 바르게 연결지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헤이와', '타타카이'를 들려주었을 때, 어느 쪽이 평화를 뜻하고 어느 쪽이 전쟁을 뜻하는지를 물어 보면 찍었을 때(50%)보다 높은 성공률로 단어를 짝짓는다고 합니다. (헤이와가 평화고 타타카이가 전쟁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연구 하나가 진리를 담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반박도 있습니다. 'bouba'라는 둥글둥글한 철자와 'kiki'라는 뾰족뾰족한 철자가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루마니아어, 중국어, 터키어 화자들에게서는 50% 미만의 성공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이돌 영상 같은 곳에 달리는 주접 댓글들을 좋아합니다. 자주 보이는 주접 댓글 중에 '지민인 어쩜 이름도 지민이야?' 같이 대상의 이름마저 찰떡같이 어울리는 것에 주접을 떠는 댓글이 있습니다. 부바/키키 효과에 따르면 지민이의 이름이 지민인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같이 볼 링크
부바/키키 효과 영어 위키피디아
부바/키키 효과 나무위키
The bouba/kiki effect is robust across cultures and writing systems
It’s a Bouba, Not a Kiki: The Relationship Between Sound, Form, and Meaning
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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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plotlib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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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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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태랑
그러고보니 대부분의 언어에서 엄마를 뜻하는 단어는 ㅁ이 들어가네요. 옹알이에서 이어지는 과도기에 가장 처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발음이기 때문일까요?
페퍼노트
생각하신 이유가 맞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할 수 있게 되는 발음이 ma, pa다 보니 세계 웬만한 언어에서 엄마, 아빠를 뜻하는 단어가 ma, pa 꼴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en.wikipedia.org/wiki/Mama_and_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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