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왕은 왜 황제가 아닐까요?

언제는 대영'제국'이라면서요!

2023.05.11 | 조회 2.6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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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노트

당신의 삶에 양념 같은 지식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할 때 '그런 것'들을 전해 드립니다.

얼마 전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국왕은 영국 이외에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자메이카 등 14개 나라의 군주 자리를 겸임합니다. 즉 '영국 국왕', '호주 국왕', '뉴질랜드 국왕' 모두 찰스 3세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이 나라들은 지금은 모두 독립된 나라지만 한 때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습니다. 5대양 6대주에 걸쳐 전 세계 육지 면적과 인구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했던 대영제국은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나라 중 가장 면적이 큰 나라였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황제'를 '왕이나 제후를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을 왕이나 제후와 구별하여 이르는 말'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는 '제국'이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대영제국보다 제국의 칭호가 어울리는 나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이라는 이름과 달리 영국엔 황제가 없고 왕이 있습니다. 왜 영국 국왕은 황제를 칭하지 못했을까요?

'황제'라는 칭호를 쓴다면 그에 걸맞는 권위가 따라야 합니다. 근거없이 황제를 칭한다면 주변국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괜한 미움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황제의 권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동아시아와 유럽은 차이를 보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의 아들 '천자' 한 사람만이 '왕'이라 불릴 수 있고 제후국의 지배자들은 왕보다 낮은 '공' 같은 칭호를 썼습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주나라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너도나도 왕을 칭하는 칭호 인플레이션이 일어납니다. 결국 진나라가 난세를 평정하는데, 진나라의 왕은 자신이 그 모든 왕들을 제압하고 정점에 섰으니 왕보다 더 특별한 칭호로 불려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황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하고 본인은 최초의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가 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를 우리는 흔히 진시황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하늘의 뜻을 받아 주변 모든 나라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질서 아래 정리한 지존을 황제라 부르게 됩니다. 물론 사례를 찾자면 그 정도의 힘과 위세가 있지는 않았던 황제들도 있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그렇습니다. 오랑캐라 천시 받았던 민족(누르하치)이든 지독하게 가난했든(주원장)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세웠다면 하늘의 뜻을 받은 천자로 인정 받았고 황제를 칭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황제 개념은 로마에서 기원합니다. '명령권을 가진 사람' 정도의 의미를 가진 '임페라토르'는 원래 로마의 한 직위의 이름 정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을 거치며 임페라토르의 권력이 차츰 강해지고 나중에는 임페라토르라는 단어가 곧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단어가 됩니다. 임페라토르는 영단어 Emperor의 어원이 됐고, 이 단어는 한국어로 옮길 때 황제로 번역됩니다.

동아시아에서 황제가 되려면 하늘의 뜻을 받은 자라는 인정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뜻은 때때로 옮겨 갑니다. 세계 질서의 중심에 서면 하늘의 뜻을 받은 자라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시황을 계승했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시황과는 전혀 다른 민족인 몽골도, 만주족도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중심에 섰을 때 황제를 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임페라토르는 하늘의 뜻보다는 개인의 직위고 세습 가능한 재산에 가깝습니다. 왕들을 다스리는 임금이라 하더라도 로마를 계승했고 임페라토르를 물려 받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면 황제로 불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황제로 인정 받은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로마와 자신이 관련 있음을 보입니다. 볼테르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고 얘기한 신성로마제국이, 굳이 로마를 자처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 동유럽에는 동로마제국이 건재했지만 서유럽에선 서로마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를 계승했다고 인정 받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에서 유행한 방법이 교황에게 로마의 후계자이자 황제임을 인정받는 방법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교황에게 그걸 인정해 줄 수 있는 정당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세에는 로마 교황의 권위가 크게 상승해서 이 방법도 충분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서유럽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차르(카이사르에서 유래했습니다. 독일어의 '카이저'도 카이사르에서 유래했습니다.)'를 칭할 때, 이반 3세가 동로마제국 황제의 조카와 결혼했다는 점, 동로마제국 멸망 후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던 것도 어떻게든 로마와 교회의 권위를 등에 업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로마의 후계자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나폴레옹처럼 힘으로 인정을 받기에는, 영국은 세계를 호령했을지언정 유럽을 제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헨리 8세가 이혼 과정에서 교황청을 시원하게 쌩깠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을 가능성도 전무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제아무리 많은 나라들을 발밑에 두어도 유럽에서 제국으로 인정 받을 순 없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유럽 바깥의 제국에 대해서도 로마를 계승할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황제, 말리의 '만사' 등은 임페라토르와는 별개로 '저쪽 세계엔 저런 황제가 있나 보다'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이 무굴제국을 멸망시킨 이후 무굴제국 황제 타이틀을 이용해 황제를 칭해보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말은 되지만 결국 권위의 문제인데 머나먼 인도 타이틀을 억지로 끌고 오는 게 짜치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계속해서 여왕 칭호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영제국은 계속해서 왕국이었던 것인데 왜 대영'제국'이라 불렸던 걸까요? 대영제국은 정식 국호가 아닙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영국은 영국이었습니다. 특별히 대영제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던 것도, 망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편의 상 영국이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던 시기를 대영제국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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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a

    1
    over 1 year 전

    유익했습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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