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은 감독 앨런 스미시, 하지만 전 한 편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가짜 감독의 이야기

2025.10.17 | 조회 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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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에 양념 같은 지식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할 때 '그런 것'들을 전해 드립니다.

영화 좋아하시나요? 어떤 영화 감독을 좋아하시나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인데요, 이 감독은 공공연하게 장편 영화 10편을 찍으면 은퇴하겠다고 말해 왔어서 팬으로서는 참 아쉽습니다.

최근 개봉한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12번째 장편 영화였고, 또 한 명의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봉준호 감독의 경우 '미키17'이 9번째 장편 영화였습니다. 나이가 여든이 넘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지금까지 장편 영화는 26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IMDB 기준으로 장편 영화만 50편을 넘게 찍은 감독이 있습니다. 단편 영화, TV 영화 등을 모두 합하면 100편도 넘는 작품을 찍었고 드라마나 뮤직비디오, 심지어는 게임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작품을 감독했음에도 그에게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명성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름도 처음 들어본다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저 역시 저 많은 작품 중에 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감독의 이름은 앨런 스미시(Alan Smithe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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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 영화는 1969년 개봉한 서부극 '총잡이의 죽음(Death of a Gunfighter)'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이 시작될 때에는 로버트 토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주연 배우 리차드 위드마크와 감독 간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이에 감독이 돈 시겔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돈 시겔은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건 중간에 교체된 로버트 토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감독 모두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렇다고 감독 이름을 비워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작사에서는 가명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알 스미스라는 평범한 이름을 쓰려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흔한 이름이라서 이미 영화계에 알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상의 감독 이름은 실존인물과 겹치지 않게 적당히 특이하면서도 너무 눈길을 끌지 않는 이름이어야 했고, 결국 알 스미스를 적절히 변형하여 앨런 스미시로 결정됐습니다. 즉, 앨런 스미시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앨런 스미시라는 이름이 'The alias men'의 애너그램이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사실은 아니지만 꽤나 절묘합니다.

의외로 두 감독 모두에게 버림받은 '총잡이의 죽음'은 꽤나 호평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후 가상의 감독 앨런 스미시는 영화계에서 맹활약을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할리우드에서 영화 감독이 영화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길 거부하는 경우에 앨런 스미시라는 이름을 쓰는 게 관행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앨런 스미시가 감독한 영화는 대부분 괴작입니다. 하지만 1984년 '듄' TV판이나 1992년 '여인의 향기' 비행기 기내 상영판 등 제법 유명한 작품에도 앨런 스미시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현재 앨런 스미시는 많은 감독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서 은퇴 내지는 사망을 한 상태입니다.

1997년, 앨런 스미시를 주인공으로 삼은 'An Alan Smithee Film: Burn Hollywood Burn'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앨런 스미시라는 이름을 가진 감독이 자기가 감독한 영화에서 이름을 빼고 싶어했지만, 하필 자기 본명이 앨런 스미시여서 그러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영화의 감독이 프로듀서의 간섭을 이유로 자기 이름을 영화에서 빼고자 해서 결국 앨런 스미시 감독의 이름으로 개봉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처참할 정도로 망했습니다. 제작비가 천만 달러가 들어갔는데 단 19개 극장에서 개봉해 45,779달러를 벌었습니다. 최악의 영화에게 주는 상인 골든 라즈베리의 5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자전차왕 엄복동'을 본 사람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음에도 모두가 이 영화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처참하게 망한 영화 때문에 앨런 스미시는 너무 유명해져 버렸습니다. 앨런 스미시라는 이름은 조용히 자기 이름을 빼고 싶을 때 쓰는 이름이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앨런 스미시라는 이름만 봐도 망한 영화라 생각하게 될 정도로 모두가 아는 이름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미국 감독 조합은 더 이상 앨런 스미시라는 가명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30년 간 조용히 100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한 앨런 스미시 감독은, 유명해진 탓에 명예로운 은퇴 내지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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