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볼드모트라는 악역이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두려워 해서 '그 사람' 정도로 부르곤 합니다. 이름을 두려워하면 그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기 마련이라는 덤블도어의 생각과 같이, 주인공 해리를 시작으로 볼드모트에 맞서기로 결심한 친구들은 차츰 볼드모트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에 어떤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은 여러 문화에 걸쳐 나타납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그 존재의 권위를 빌려 올 수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기독교 문화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같은 말을 쓰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Oh, my God!"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들 하는데, 신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Oh, my goodness!" 같은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유교 문화권에서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부모님의 성함을 얘기할 때에 '자'를 끼워 넣지 않으면 불편한 마음이 드실 겁니다. '자'나 '호'도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삼국지의 배경이 된 문화에서는 가족들이나 명백한 윗사람만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의형제인 관우나 장비가 "유비 형님"이라 부를 순 있어도 그 외의 경우에는 "유현덕" 등 자로 부르거나 "좌장군" 등 관직명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입니다.
임금에 대해선 더욱 엄격하여서, 임금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는 보통 사람들이 쓸 수도 없었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경우 이름에 쓰는 한자들이 워낙 자주 쓰이는 글자들이라 많은 이들이 고생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아직도 관음보살로 흔히 불리는 이유도 이세민 때문입니다. 행정부서였던 '민부'도 '호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게 건너 와서 조선의 육조에서도 '민조'가 아닌 '호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이름 글자는 물론이고 탁발승이었던 본인의 과거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승려 승(僧) 자도 못 쓰게 막았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임금들은 백성들을 배려하여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글자를 외자로 하여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세종의 이름 글자인 도(裪) 자를 저는 어떤 단어에서도 본 기억이 없습니다. 태조나 철종처럼 태어날 때에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어서 원래 흔하게 쓰는 한자로 이름을 지었다가 살다 보니 왕이 된 경우에는 이름을 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선 뿐 아니라 청나라 순치제의 경우에는 "나 한사람 때문에 천하가 복(福)을 잃게 하지 말라"는 폭풍 간지 명령과 함께 본인 이름에 들어가는 복(福) 자를 일반 백성들이 쓰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글을 쓰게 만든 계기는 곰입니다. 곰을 뜻하는 영단어 Bear는 그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현대 영어의 Brown에 해당하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고대인들이 곰을 두려워 했거나 혹은 신성시한 나머지 곰을 뜻하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기 보단 '갈색의 그 분' 정도로 돌려 말하다가 아예 명칭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원래 곰을 뜻하던 단어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비단 영어 뿐 아니라 다른 게르만어파에서도 Bär(독일어), Björn(스웨덴어) 등 이와 같은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찌감치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도유럽조어에서 곰은 h₂ŕ̥tḱos라고 하니 아마 단어가 살아 있었다면 이 단어에서 변형된 형태였을 것 같습니다.
슬라브어군에서는 медведь(러시아어, 메드베지), ведмідь(우크라이나어, 베드미디) 등으로 쓰는데 이 또한 "꿀을 먹는 자" 정도의 돌려 말하기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인들이 얼마나 곰을 두려워 하거나 신성시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볼드모트나 '귀멸의 칼날'의 무잔, 크툴루 신화의 하스터를 떠올리게 합니다. 현대 중국에서 시진핑과 닮았다는 이유로 곰돌이 푸를 검열하는 것이 얼핏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하는 문화에 대해 알아 보았는데요,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무례라 여겼던 유교 문화권에서는 한편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굳이 고르자면 저는 이쪽이 취향인 것 같습니다. 페퍼노트가 페퍼노트의 아버지인 제게 효도를 다할 수 있도록 페퍼노트가 이름을 드날렸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불러주시고 많이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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