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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사는 엄마와 이혼 후 따로 살아온 아버지를 “로빈 후드 같은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찌질한 동네 건달일 뿐이다. 오랫동안 못 보고 살면서 환상을 키워온 것이다. 앨리사는 뒤늦은 깨달음을 토로한다.
“사람은 정답이 될 수 없어요(People can’t be answers). 더 많은 질문을 만들 뿐이죠.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요. ‘아빠는 왜 이렇게 형편없지?’”
완벽한 인간은 없는데도 누군가를 이상적인 존재로 여긴다는 건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일이다. 그렇게 사람을 정답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하느라 에너지를 쓰는 대신 ‘피리 부는 사나이’ 뒤만 졸졸 따라가면 된다.
제임스는 앨리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뭐가?” “널 정답으로 삼으려고 했던 거.”
누군가를 정답으로 착각했다가 실망하고, 다시 다른 정답을 좇아 헤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누구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 진정한 만남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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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실은, 이런 종류의 로맨스가 끝장날 때에는 어떤 변명이든 늘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세부 사항만 조금 다를 뿐 이런 이야기는 항상 똑같이 진행된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을 우상화한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을 따라다닌다.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여성을 받아들여 준다. 젊은 여성은 나이 든 여성이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이야기 끝."
지혜롭게, 품위 있게, 우아하게, 존엄하게! 나이 들기 앞에 주로, 늘 붙곤 하는 수식어다.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용인할 수 있는 나이 듦은 이 정도까지라는 걸까. 이 수식어들은 그저 두루뭉술하게 긍정적인, 그러나 의미는 매우 애매모호해서 결과적으로 추상적이다. 나이 드는 과정에서만큼은 개성과 문화 다양성의 원칙이 무시되어도 괜찮다는 것일까. 잘 나이 들기가 화두가 되려면 '잘'에 대한 사회적 자유가 온전히 주어져야 한다. 현실 속에서 '잘'은 늘 개인과 구조의 타협이고 조율이지만,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온전한 자유가 인정되어야 하고, 그것은 늙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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