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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솔이 선산 지킨다’라는 속담이 있다. 곧게 잘 자란 소나무는 궁궐 건축 등에 귀하게 쓰이기 때문에 한양으로 보내지는데, 구불구불하고 볼품없게 자란 소나무는 가치가 없어서 그 자리에 남아 선산을 지키는 나무가 되기에 생긴 말이다. 큰일 하느라 바쁜 잘난 자식 대신 못난 자식이 부모 곁에서 봉양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굽은 솔이 선산 지킨다‘는 속담을 생각한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 능력을 펼치러 떠날까봐 상대를 일부러 ‘굽은 솔’로 만들어 ‘선산’을 지키게 만드는 사람이. 늙은 자신을 무시하고 봉양하지 않을까봐 자식 중 하나를 어려서부터 구박해 길들이는 부모가.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비웃을까봐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적 언행을 하는 가장이. 자신이 못나 보일까봐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성의 능력이나 외모를 깎아내리는 남자가. 한편 반대쪽에는 무시당했기에 오히려 학대받는 관계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못났다고 세뇌당하며 자랐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나치게 헌신하는 자식들이. 남자형제와 차별받고 자랐기에 늙은 부모의 병수발을 당연히 강요당하는 딸들이.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여겨서 대가 없이 노력하는 여성들이.
루이자 올컷이 살았던 19세기와 지금은 얼마나 다를까. 나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너무 애쓰지 않기를 바란다. 기억하자.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굳이 나를 옆에 두려는 사람이 바로 나를 ‘굽은 솔’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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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가난한 노동자로서 극우 활동을 시작한 레이 힐은 70년대 말까지 근 20년간 영국 극우단체 브리티시무브먼트 부회장과 브리티시국민당 창당멤버로 활동하고 남아공국민전선(SANF) 대표까지 지냈다. 그는 1980년 전향한 뒤 극우조직 내부정보원으로서 조직 와해와 테러 저지에 기여하고 극우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하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직업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평생 노동자로 살았던 그는 정치의 부재야말로 극우의 온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칠면조에게 크리스마스에 표를 주라(ask turkeys to vote for Christmas)’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결코 정치적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hiding to nothing)’고 말하곤 했다. 공적인 해악을 알면서 극단주의를 선동하는 이들에게 극단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의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바에 동조하라는 요구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한때의 나처럼)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 계급이 극우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그들에게 영감의 리더십과 진정한 열망, 무엇보다 희망을 위한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는 주류 정치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당신의 불행이 모두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인종 편견은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세우는 동력이 된다. 가난과 고통은 더 이상 내가 못난 탓이 아니다. 모든 원인은 이민자들에게 있고, 이민자와 싸우는 것이야말로 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된다.”
극우운동에 포섭된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계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한사코 삼갔다. 극우의 유혹에 그들(의 처지)이 얼마나 취약한지, 유혹의 방식과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능란한지, 그래서 저항하기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극우를 자라나게 하는 궁극적인 토양, 다시말해 책임이 정치의 실패, 정치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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