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미술관을 마음껏 부수라구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11.18 | 조회 78 |
0
|
visitor.see의 프로필 이미지

visitor.see

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첨부 이미지

구독자에게 3층짜리 미술관을 가지고 마음껏 작업 해보라고 하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저는 한번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어떤 그림을 걸면 좋을지, 어떤 작품을 보여주면 좋을지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아트선재센터는 1995년 열렸던 첫번째 전시 『싹』 을 기념하며 아르헨티나-페루 아티스트인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개인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이하, 『적군의 언어』)를 선보였습니다. 장소특정적 작업인 동시에 가변설치 작업은 하나의 세계를 서울시 종로구 한복판에 소환해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세계를 천천히 탐험하는 즐거움이야 말로 장소특정적 작업을 즐기는 동시대의 행운이죠.


안전한 멸망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 일부, ©차영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 일부, ©차영우

『적군의 언어』는 작가 스튜디오 멤버 11명이 아르헨티나에서 서울로 와 6주 동안 현장에서 직접 제작한 전시입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한국 첫 개인전으로 미술관 전체를 거대한 설치 조각으로 바꾼 작업이죠. 이 작업을 통해 아트선재센터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관객들은 입장하는 순간 모험가가 되어 폐허처럼 변해버린 미술관을 탐험합니다. 

지하의 강당은 의자를 비닐로 싸매두었습니다. 이 단순한 변화가 일상적 공간을 순식간에 방사능 피폭, 지진의 피해, 보존하려는 안간힘을 쓴 풍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두운 계단을 따라 미술관을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관람객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마주치죠. 기계생명체 같기도 하고, 휴머노이드같기도 하면서 전쟁 병기 같기도 한 존재들을 지나치면 시공간을 초월한 ‘타임 엔진‘ 조각 작업과 마주칩니다. 이 모습은 기후 위기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인간 문명의 존속이 불안한 시기에 디스토피아를 시각적으로 재현합니다.

미술관의 권위적인 규칙을 모두 파괴하는 한편 미술관 안에 디스토피아를 상상한 작가는 “우리는 이대로 생존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전히 이 작업이 미술관 안에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이 멸망한 풍경을 안전하게 향유합니다. 미술관은 이미지가 재현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멸망의 풍경을 제3자의 입장에서 안전하게 지켜봅니다.


재현하는 공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 일부, ©차영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 일부, ©차영우

비야르 로하스는 미술관의 벽글을 일부러 풍화시키고, 하얀 벽을 해체함으로써 미술관의 권위를 해체합니다. 그리고 약 30년간 익숙하게 사람들이 지켜왔던 동선을 막아버리면서 건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공간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는 미술관입니다. 작가의 작업은 이 안에서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을 뿐, 현실 세계에 그 어떤 간섭도 미치지 못합니다.

미술은 관객들의 심리적 장벽을 깨부수고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향유할 수 있는 오락으로 변화시키기도 하죠. 비야르 로하스가 만든 멸망의 풍경은 오히려 미술관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게 느껴집니다. 도로 위에서 만나는 싱크홀은 인간을 무작위로 위협하는 위험이지만 반대로 미술관 안에 구현된 싱크홀은 그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동시에 편하게 피해갈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인류에게 멸망은 그렇게 먼 이야기일까요? 우리는 착실하게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류는 인류의 아군일까요, 적군일까요? 물리법칙은 피아식별이 가능할까요? 안전한 멸망을 재현하는 공간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는 아주 위험한 언어가 됩니다. 미술관 안에 안전하게 구현된 멸망은 그 자체로 멸망을 조금 더 쉽게 생각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죠.


피아식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 일부, ©차영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 일부, ©차영우

작가가 ‘타임 엔진’으로 미술관을 새로운 시공간으로 바꾸어 버리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관람객은 불청객이자 ‘타자(Object)’로 변한다. 세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주체(Subject)’는 자신들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에 입장함으로써 강제로 타자화가 된다. 

『적군의 언어』는 미술관 안에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재현된 타자화된 세계를 기존 세계의 주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다. 즉, 미술관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가 만들어둔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 안의 법칙은 지구의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는 듯하지만 조금씩 뒤틀려있다. 이를 통해 피아식별의 기준이 무너져내린다. 이런 점에서 이 공간은 ‘이성’이라는 기준을 통해 이룩한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세계로 구축된 셈이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비야르 로하스의 세계에 입장함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세계는 우리의 아군인가, 적군인가? 반대로 인류는 영원히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로하스가 새로 빚어낸 세계는 미지의 영역으로 존재하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누구냐, 넌?”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25.9.3 ~ 26.2.1

입장료: 10,000원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visitor.see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5 visitor.see

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