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대략 2017년경부터 미국에서 시작해 우리나라까지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세기 이란의 카자르 왕조 나시르 앗딘 샤 왕의 8번째 딸, 타지에스 살타네 공주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하여 구혼자만 145명에 달했고, 그중 13명은 공주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살까지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아름다운 공주에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은 공주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공주는 지금의 미의 기준과는 사뭇 다른 풍만한 몸매와 큰 얼굴, 그리고 누구보다 짙은 눈썹에 콧수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 속 공주의 외모를 보고 요즘 미의 기준과 다르다고 놀라기도 했는데요. 그는 과연 아름다운 외모로 역사 속에 남게 된 걸까요? Almost famous의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지에스 살타네 공주의 이야기는 대부분 거짓입니다. 그럼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사실인지 그리고 실제 인물은 왜 역사 속에 남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83년 지금의 이란 테헤란 지역에서 태어난 타지 공주는 당시 페르시아를 지배했던 카자르 왕조 왕의 11남 10녀 중 8번째 딸이었습니다. 타지 공주는 13살에 국방부 장관의 아들인 하산과 결혼했고, 여자들만 있는 하렘에서 자라와 남자라고는 친인척밖에 만날 수 없었던 공주에게 145명의 구혼자가 있을 리가 없었죠. 그러니 13명이 거절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렘은 내관을 제외한 남성의 출입이 제한되는 여성들만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그는 아름다운 외모로 명성을 크게 얻었을까요? 당시 미의 기준이 지금과는 달랐으므로, 실제로 타지 공주는 아름답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타지 공주는 자서전에서 “위대하신 신께서는 내게 아름다운 외모를 선사하셨다”라고 언급하기도 했거든요. 이 시절 이란에서는 남성의 짙고 두꺼운 콧수염과는 다른 부드럽고 옅은 콧수염과 짙은 눈썹이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19세기를 휩쓸었던 이런 미의 기준은 순식간에 못생김과 남성성의 상징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그 후로 1824년, 여성잡지에서는 마스카라로 칠한 콧수염을 촌스럽다고 지적했고, 얼굴에 털이 없고 허리가 가늘며 피부와 머리카락 색이 옅은 유럽 여성들의 미의 기준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영향으로 이란의 여성드른 눈썹과 콧수염을 뽑고 살을 빼며 유럽식 미의 기준에 맞춰갔죠. 그렇다면 타지 공주는 무엇으로 유명했을까요?
타지 공주는 대놓고 왕실을 비판하고 국민의 삶과 여성 인권을 위해 앞장서는 인권 운동가였습니다. 그는는 13살에 한 정략결혼을 극도로 싫어했고, 결혼은 사랑이 기본 전제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는 자녀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고, 두 딸과 두 아들을 두었지만, 임질 또는 매독으로 추측되는 남편의 성병으로 인해 아이를 낙태해야 하기도 했죠. 그의 남편은 다른 여성들처럼 고분고분하지 못한 타지 공주에게 불만이 있었고, 결국 두 사람은 1907년 이혼하게 됩니다. 그렇게 타지 공주는 왕실 역사상 최초로 이혼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유로워진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타락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했죠. 하지만 그런 주체적인 공주의 모습을 사랑했던 시인 아리프 카즈빈은 타지 공주를 위한 시를 썼습니다. 지적이고 다방면으로 뛰어났던 타지 공주는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그림과 글, 바이올린에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타지 공주는 대놓고 아버지와 오빠의 통치를 비판하고, 국민이 겪고 있는 가난과 교육의 부재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성 인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타지 공주는 이란의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로 여성 자유 연대를 조직했으며, 왕실 여성 중 최초로 히잡을 벗고 서양 복식을 입었습니다. 타지 공주가 쓴 자서전은 여성 인권에 관하여 이란 여성이 쓴 최초의 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타지 공주는 만약 이란의 여성이 다른 나라의 여성처럼 자유롭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면 자신 역시 지도자가 되려 했을 거라며 나라를 발전 시키기 위한 생각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여성에게 천을 뒤집어씌우는 이 나라의 문화가 되려 타락한 도덕적 성향을 퍼트리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죠. 1936년, 가난에 허덕이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타지 공주는 죽음 이후에도 유명인이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대로 전설의 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을 따르지 않는 새롭고 개방적인 그의 삶의 방식과 국민의 삶과 여성 인권을 생각하는 그의 말에 감명받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후에도 사람들은 타지 공주의 모습을 쟁반부터 카펫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에 그려 넣었으며, 오늘날에도 이란에서는 타지 공주의 삶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타지 공주의 후손들인 이란의 여성들. 이들은 이슬람 국가에 살고 있음에도 투표권을 가지고 있고, 운전도 할 수 있는 등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여성들의 인권이 향상된 데에는 타지 공주의 영향이 컸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온 보편적인 미의 절대기준 (Beauty standards)의 허점을 짚으며 위대한 업적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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