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엄마의 땅 : 그리샤와 땅의 주인> 박재범, 2023
일종의 더미(dummy)를 이용한 작품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이었습니다. 당시 파주 헤이리의 한 전시에서 샀던 엽서가 아직도 책상 서랍에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스톱모션으로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던 거 같습니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래 부동의 인형을 손으로 조금씩 움직여가며 찍은 사진으로 운동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마치 시대를 역행해가며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내가 잠들면 인형들이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동심의 바람이 진짜 이뤄진 것 같은 이미지는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다분히 매력적입니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어려움 때문에 스톱모션 기법으로 제작된 국내 작품은 단편에서만 접해왔던 터라, 최근 개봉한 박재범 감독의 <엄마의 땅: 그리샤와 땅의 주인>(2023)(이하 <엄마의 땅>)은 무척 반가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최초 스톱모션을 활용했던 1967년 <콩쥐팥쥐>(조긍하)와 1977년 <흥부와 놀부>(조수영) 이후 45년 만에 장편이 나왔다고 하니 그 반가움이 결코 과한 게 아니겠지요.
<엄마의 땅>은 극지방 툰드라에서 순록을 키우는 예이츠 부족의 유목민 소녀 그리샤를 따라갑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몸져눕자 아버지는 도시로 약을 구하러 떠나고 그리샤와 남동생 꼴야는 툰드라 숲의 주인이라고 일컫는 붉은 곰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이 붉은 곰을 찾는 또 다른 일행이 있는데요. 바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나선 러시아 군인 블라디미르와 그를 돕는 툰드라 사냥꾼 바쟈크입니다. 이들은 원주민들의 정신과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 정령으로 여겨지는 붉은 곰을 사냥하려고 합니다.
동물을 대하는 자세
이야기의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화는 환경에 대한 주제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순록 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예이츠 부족은 영하 50도의 척박한 환경에서 순록과 함께 유목생활을 하며 자연 친화적인 생활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얄팍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갓 잡은 순록의 뜨거운 피를 부족원들과 나눠마신 그리샤의 아버지가 블라디미르 군인에게 분노하는 그리샤에게 “이 땅에 원한의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순록의 생명을 취하면서도 순록을 가족처럼 소중히 여기는 부족의 태도는 영화의 결론에 가면 그 묵직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반면, 블라디미르 군인으로 대변되는 자연을 통제하고 개발하려는 정복하려는 제국주의적 태도는 예이츠 부족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순록이 끄는 눈썰매와 육중하고 높은 스노모빌은 명확하게 그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교통수단입니다. “일렁이는 땅을 만나면 순록들만 따라가면 된댔어”라고 말하는 그리샤의 대사에서 자연의 특징을 관찰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썰매가 이동한다면, 스노모빌은 얼음언덕이나 나무, 심지어 동굴의 바위까지도 가차없이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움직이지요. 미신적인 가치 따위는 계몽되어야 마땅하다는 블라디미르의 신념. 그리고 가족의 몰살이라는 슬픔 앞에 전통과 부족에 대한 증오만 남은 바쟈크의 감정. 이들은 신념과 감정에 삼켜져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 스노모빌의 움직임과 유사합니다.
무채색의 향연 속 붉은 이미지
눈산과 눈밭, 얼음들, 눈보라, 흩날리는 눈발... 일년 내내 눈으로 덮여있는 툰드라를 표현하기 위해 미술팀은 스티로폼과 설탕, 베이킹소다 등 다양한 질감의 재료를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미묘하게 눈의 질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설경은 재료뿐만 아니라 조명과 바람을 통해서도 느껴지는데 마치 무채색의 향연이라고 할 만큼 매 장면이 섬세하게 연출되었습니다.
차디찬 하얀 눈을 물들이는 그리샤의 선붉은 코피는 불길한 징조처럼 보이지만, 붉은 곰이 등장하면서 붉은 빛깔은 신비한 힘과 능력으로 느껴지게 되죠. 푸른 이끼가 싱그럽게 깔린 동굴, 커다란 바위틈에 동글동글 매달린 붉은 열매는 생명에 대한 이미지를 더합니다.
모든 생명은 자연의 일부
블라디미르의 총을 맞은 붉은 곰은 쓰러지고 총구를 겨눈 그의 앞을 그리샤가 막아섭니다. 격분한 블라디미르가 그리샤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리고 죽어가던 붉은 곰은 대자연을 대변하는 소리로, 그리샤의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샤에게 나타나 명령합니다. 칼로 자신의 배를 갈라 방금 삼킨 붉은 열매를 꺼내어 가라고. 붉은 곰의 명령은 모든 죽음이 다 같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억지스러운 생명 연장보다는 생명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한 존재의 죽음이 다른 존재의 삶에 유용하기를 기꺼이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 겸허해지는 순간을 맞이한 그리샤는 자연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게 되지요. 환경문제와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 연령을 막론하고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울림을 주는 애니메이션이였습니다.
“어머니시여, 저는 당신의 딸, 저는 오늘 당신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모기수다 시즌2 ]
🎬 새로운 공간에서 만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1월의 영화 <퍼스널 쇼퍼>(2016)에 이어,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또다른 작품,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2014)를 함께 감상했습니다. 같은 감독의 영화를 연이어 감상하며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지닌 작가주의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었네요.
특별히, 2월부터는 새로운 공간에서 모기수다를 진행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는데요, 출판사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공유해주신 멋진 공간에서 앞으로의 모기수다 모임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훨씬 접근도가 높은 공간이기에,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 2월의 모기수다 모임부터는 공간과 음료, 간식 등을 위한 최소한의 회비를 책정하게 되었습니다. (회당 5천원, 2~10월 일시 납부시 3만원, 모기영 정기후원자 무료)
"예상 문제에서 답 없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레이첼 헬드 에반스 <헤아려 본 믿음> (바람이불어오는곳)에 대한
최은 수석프로그래머의 회고의 글이 뉴스앤조이에 소개되었습니다.
봄날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대지를 덮을 것 같은 날들이네요.
새 계절을 맞아, 모기영도 기지개를 켜는 중이랍니다.
무럭무럭 자라날 모기영,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 박일아 프로그래머
편집디자인 : 강원중
2023.2.18.토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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