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성경을 다루는 영화
올해 4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 대해 해찰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은 적 있습니다. “성경의 장소가 재현되지 않고, 성경 속 인물이 같은 이름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기독교적 진리는 이렇게 제시되고 재현될 수 있음을 <에에올>은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https://maily.so/cff4every1/posts/91d0b2ac) 여전히 이 생각을 철회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놓친 것에 대해선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독교적 진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화는 어떤가요? 영화의 주인공이 성경의 인물이고, 인물이 놓인 시간과 장소가 그동안 저희가 익히 성경책에서 보았던 것을 구현한 영화 말이에요. 민망한 얘기이긴 하나, 저는 그런 식의 영화를 얼마간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핍진한 이야기보다 하고 싶은 메시지가 성급하게 강조된다거나, 인물은 입체적이지 않고 납작하다거나 하는 식의 오해를 가졌던 것 같아요. <바울>을 보면서 저는 제 생각의 편협함에 대해 곱씹었습니다.
<바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고, 그것은 곧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으므로 반역죄로 로마 지하 감옥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빈자리를 대신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 교회 공동체를 돌보지만,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로마 대화재의 혐의를 받은 탓에 이따금씩 ‘로마의 불빛’(화형을 가리킵니다)이 되거나 원형극장의 경기를 통해 맹수의 밥이 되던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불안과 염려, 로마 당국과 시민을 향한 적개심을 잠재우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로마에 도착했고, 곧이어 구금된 바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사도행전의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 제가 매혹된 점이 바로 이런 지점이었습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부분으로 과감하게 파고들어가 내적인 설득력을 갖춘 장면을 만들어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점이요. 잘 아시다시피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사도행전 28:30-31) 적어도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아직 죽지 않습니다. 어떤 죄가 그에게 있어서 로마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대 그리스도인을 둘러싼 구체적인 정황은 무엇이었는지와 같은 점은 성경이 다 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해요. 그러면서 이른 바 ‘바울의 세계’를 구성해서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의 세계’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바울>이 바울을 이루는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두는 것 같진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행동 이면에 숨어있는 그의 속마음을 헤아려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영화는 그런 사려깊은 시도를 바울에게도 한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도는, 그간 저희가 막연하게 바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이나 이미지를 깨트려버리고, 바울을 보다 친근하고 저희와 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죠. 영화에서 대표적인 시도는 이런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은 악몽에 자주 시달리는데요.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사울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체포하거나 매로 때리거나 때로는 죽이기도 합니다. 자주 사람들을 흘겨보느라 사울의 눈은 날카로운 상태인데, 그 눈길로 문득 자기 손을 내려다봅니다. 사람들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는 두 손을요. 그리고 바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깹니다.
이런 장면은 바울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죄의식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주죠. 지금은 아무리 복음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시간이 흘러도 씻기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의 피의 얼룩이 자기 손에 여전히 묻어 있고, 그것이 그는 그토록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악한 과거가 떠오르면서 죄의식도 동시에 짙어지죠. 특히나 예수는 바울의 그런 행동에 대해 그건 나 자신을 박해하는 것과 같다고도 했으니까요.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사도행전 9:5) 그러면서 이런 생각에도 머물게 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그토록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 있던 것은 그가 손에 묻힌 피에 대한 속죄 의식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요. 그리고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이 적은 이 문장도 훨씬 더 깊은 의미로 생각하게 되죠.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
물론 저는 이 생각을 하나의 신학으로 정립하거나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생각이 옅어서도 하거니와, 제가 지금 하는 생각은 바울의 신학을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내면을 이해해보려는 것이니까요. 비슷한 예로 톰 라이트는 『바울 평전』에서 알게 되면 더 안쓰러운 바울의 내면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러니까 사역의 단계마다 시간만 낭비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사역이 결국은 허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는 거예요. (톰 라이트, 『바울 평전』, 비아토르, 163쪽) 그런 불안이 그를 괴롭혔으므로 그는 도리어 이런 문장을 적을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2:2) 이런 대목은 바울 서신을 단지 딱딱한 성경이라는 껍질 이면에 아주 부드럽고 섬약한 바울 한 사람의 내면에까지 아주 조금은 접근할 수 있게 만듭니다.
성경을 재현하려는 영화나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목표가 있다면, 이런 점이 아닐까 싶어요. 성경이 공백으로 남겨두는 지점으로 들어가 그 인물이 실은 우리와 같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고, 그런 한계와 약함을 견디면서도 끝내 하나님과 복음을 선택하려는 마음을 보여주는 일 말이에요. 그럴 때 ‘신앙’이라든지, ‘믿음’이라는 단어는 거룩하게 표백된 채로 더이상 우리와 동떨어진 낱말이 아니게 될 겁니다. 이번 여름, <바울>을 통해 저마다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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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이번 시네마 분더카머는 설교조에 가까워진 것 같아 뜨끔하기도 했는데요. 때로는 성과 속을 구분하는 태도를 저도 실은 갖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은 반성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적이고, 교회적인 단어나 생각을 철지나거나 낡은 것, 혹은 따분하거나 딱딱한 것으로 여기던 마음의 태도도 성과 속을 구분하는 하나의 교조적인 입장일 수도 있겠다는 반성 말입니다. 여름, 쉬어가는 시간 동안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모기영과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글 : 이정식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4년 08월 05일 월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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