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지 않는 계단 #6

2021.07.12 | 조회 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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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 제목 : 엘리베이터

  잘 지냈나? 친구. 자네 이름이 철호라는 건 이미 내가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굳이 이름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네. 우리가 딱히 친해져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하하. 그러니 나는 자네를 앞으로도 그냥 친구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네. 자네도 편하게 나를 부르게나. 자네는 나한테 특별하게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지만…

  어제는 자네 몸을 인수인계받고 두 번째 날이었네. 첫 번째 날에는 보통 인수인계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나? 자네 회사 굴러가는 시스템을 보니 대충 그렇더군. 그게 인간이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방식이 아닌가. 나는 자네가 누군지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주변부터 조사하기 시작했지. 뭐 조사라고 해서 수사관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그런 방식은 아니라네. 우선 자네가 쓰는 SNS를 살펴봤지. 자네는 비교적 SNS에서 허세를 부리는 타입은 아니더군.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일단 그 점 하나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네. 아무튼 그다음은 자네가 어떤 일을 하는지 업무를 점검해보고 싶었는데, 나는 그 방법으로 자네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택했지. 아주 말이 많은 박 팀장을 옥상에서 만났다네. 전자 담배를 맛있고도 격렬하게 피우고 있더군

  박 팀장은 야근 중이던 모양이었어. 일하다 무료해서 잠깐 쉬러 올라간 거겠지. 나는 박 팀장을 전혀 모르지만 박 팀장은 나를 꽤 잘 아는 눈치였어. 이것 참 모르는 사람과 아는 척 대화하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말이야. 이럴 때는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를 들었지 나는 인간이 만든 매뉴얼대로 실천했어. 사람들은 말에 다들 굶주려 있어서 기회만 생기면 조금이라도 더 바깥으로 토해내려고 아주 안달이 난다니까. 그게 내가 깨달은 인간들의 본성 중 하나지. 아무튼 박 팀장은 뭔가 재밌는 일이 있는지 그걸 찾아다니는 친구 같았어. 이것저것 회사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들, 그러니까 대표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 말 듣지 않는 팀원들 때문에 골치 썩는 일들, 새로운 과제에서 예산을 따내는 방법, 뭐 이런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꺼내더군. 꽤 시시콜콜했어. 그걸 드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니까. 뭔 말이 그리 많은지 귀가 너무 따가울 정도였다니까.

  아, 인간들이 말이 많다고 투덜거려놓고 오늘 메일도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이거 영 미안해지려고 하네그려. 이해해 주기 바라. 인간 세상을 인간의 육체에 깃드는 일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나도 낯선 게 보통 많아야지. 게다가 오늘 박 팀장에게 기묘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걸 조만간 실천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야. 자네로서는 그리 반갑지 않겠지만, 난 공포 같은 걸 전혀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묘한 이야기라고 하니 괜히 도전해보고 싶더라고. 특히 인간으로서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란, 과연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부분도 무척 호기심이 생기고.

  박 팀장이 담배를 피우면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묻더라고. “이 대리 밤 12시가 되면 아래층에서부터 스르르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소문 혹시 들었어? 요즘 납기 일정 때문에 철야하는 팀이 가끔 있는 모양인데, 그 팀원 중에서 한 명이 이상한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김상식 사원이 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고 나한테 얘기를 해주더라고 말이야”라고 박 팀장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야.

  박 팀장의 이야기는 그런 거였어. 밤 12시만 되면 아무도 호출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60층으로 저절로 올라온다. 그것도 정확하게 12시 정각에. 그리고 더 수상쩍은 것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옴과 동시에 여자 향수 냄새가 60층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그리고 철야 작업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남을 경우, 건물 복도에서 누군가 걷는 것 같은 저벅저벅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분명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면 아무도 없다. 뭐 소문의 진상은 이런 거였어.

  난, 아주 흥미진진했지. 내가 이 건물 주변을 오래도록 떠도는 일종의 지박령과 비슷한 족속이라 이곳의 이야기라면 거의 모르는 게 없을 정도인데, 12시가 되면 도착하는 엘리베이터와 여자 향수 냄새라니 난 그런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 내 소식통이 형편없는 건지. 내 능력의 반경이 줄어든 건지. 아무튼 이거 너무 기묘하면서도 흥미롭지 않아? 난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물론 나는 실제로 잠을 자진 않지만, 아무튼 잠을 자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서 그 소문의 진상을 빨리 파헤치고 싶었다니까.

  일단 그 경험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려면 회사에 혼자 남아있어야 돼. 여러 명과 있을 때는 사건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나는 혼자서 재미를 보는 편이라, 누군가 개입하는 건 싫어하니까. 그래서 그날을 기다리게 됐지. 회사 일정을 매일 체크해야 했어. 철야작업하는 팀이 없는지 11시 30분쯤 되면 괜히 60층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리면서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듣는 척했지. 늦었으니 빨리 퇴근하라는 말도 잊지 않고. 게다가 여긴 12시가 되면 셔터가 자동으로 내려가는 시스템이라. 시간을 넘기면 건물 밖으로 다음날 6시까지 강제적으로 밤을 새워야 하니까, 빨리 나가라고 종용하기도 했어. 뭐, 그래도 내 말을 딱히 듣지 않더라고. 다들 얼마나 바쁜 건지. 그리 몸을 축내면서까지 일을 한단 말이야. 누가 알아준다고. 다음에 편지 쓸 때는 부디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특별한 경험을 들려주기를 바랄게.

 

그럼 이만 총총

너의 친구 더스트가.


 

  더스트는 나에게 엘리베이터를 계속 언급했다. 엘리베이터에 관련된 소문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따위 이상한 미신 같은 이야기는 잘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컴퓨터의 코드뿐이다. 내가 생각한 체계대로 정확하게 역할을 다하는 코드가 내가 믿는 세계의 전부다. 나는 그 속에서 안정을 찾고 미래를 설계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시스템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역할을 수행하건 상관없다. 내가 시스템의 일부이어도 상관없다. 나는 현재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니까. 그런데 엘리베이터, 여자 향수 그런 이야기는 나를 이상한 세계로 내몬다. 시스템과 별개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시키는 것이다. 나는 굳이 그런 망상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특정한 상태에 내몰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내가 원한 게 아니다. 나는 흔들리고 싶지 않다. 그런 이야기는 가설의 범주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한없이 가벼운 먼지와 같은 거다. 더스트가 만든 먼지 같은 이야기, 그저 듣고 있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이야기가 내 삶을 지금 뒤흔들려고 한다. 어느새 나는 그의 편지를 기다리게 일상이 되었다. 그가 어떤 모험을 겪게 될지 옆에서 응원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할까. 나는 그와 내가 시간을 배분하는 방식, 서로의 위치에서 나름 열심히 달리다, 때가 되면 바통을 주고받는 방식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와 그는 각자의 삶에서 서로에게 구원은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기능을 다하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잠자코 내 일을 하면서 그가 전하는 엘리베이터의 다음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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