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가출했다.

2021.07.19 | 조회 8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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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소설입니다.


  한 달간의 방황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사라진 상태였다. 처음엔 마트에 쇼핑하러 간 것으로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아내는 대체로 늦게 퇴근하는 편이었으니까. 야근도 잦고 회식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직장에 다녔으니까.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없이 마트에 자주 들렀다 오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11시를 넘기고 자정을 넘어서도 아내에게 연락이 없자, 상황이 점점 위중한 상태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으나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아내와 나 사이에 놓인 모든 통신 채널이 단숨에 막힌 것 같았다.

  뭔가 짚이는 게 있어 9단 서랍장 제일 오른쪽 아래, 통장이 보관된 곳을 슬쩍 열어봤다. 설마 했지만, 현금뿐만 아니라, 통장까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내 공인인증서까지... 8번째 칸에 들어있던 귀금속 류, 순금 돼지와 황금 열쇠, 결혼반지를 포함한 금으로 만든 물건 역시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납으로 만든 값어치 없는 기념 반지만 남겨진 채.

  소파 위에 앉아서 허망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정신줄을 놓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를 넘겼다. 아내의 가출과 상관없이 짜증 나게도 졸음이 몰려왔다. 분명 비상 상태였다. 통장과 모든 현금이 사라진 긴급한 상황이 아닌가. 심지어는 돈이 될만한 거의 모든 물건들조차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것은 완벽하게 의도된 행위였다. 그런데 나는 잠이 쏟아지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상황을 떠나 잠을 자는 건 부교감 신경의 문제가 아닌가. 새벽 3시는 마땅히 침대 속에 있어야 할 시간이다. 아무리 심각한 일이 터졌을지라도.

  공인 인증서가 사라졌다는 게 문제긴 했다. 하지만 새벽 3시에는 역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아내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의도하는 거라면 앉아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을 자도 뜬 눈으로 밤을 새워도 어차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온라인에서는 어쩌면 내 모든 재산이 다른 곳으로 차곡차곡 옮겨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잠의 유혹을 견딜 수 없었다. 눈꺼풀이 아래로 점점 무겁게 쏟아져 내렸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햇살은 눈부셨고 세상은 여전히 평온했다. 간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뒤틀린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두 눈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긴 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냥 모든 게 기묘했다.

  그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어제가 아니었다면 다음 주에라도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역시 어제처럼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믿음이란 그렇게 낙관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결코 깨뜨려지지 않을, 그러니까 어떤 의도적인 외압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안전할 저 화병에 담긴 장미꽃처럼 말이다. 그런데 글을 쓰던 그 순간, 멀쩡하던 화병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공기가 강압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노려보지도 않았으며 바람이 몰고 와서 녀석에게 강한 파동을 보내지도 않았다. 어떤 흔들림조차 없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화병이 혼자 부르르 떨더니 세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일단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내는 분명히 가출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 재산을 들고 용의주도하게 아내와 내가 20년 넘게 함께한 이 정든 공간을 내처 버렸다. 나는 실직한 상태였다. 입출금 통장의 1원까지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6개월 동안 받던 실업급여도 끝이 났다. 게다가 한 달 동안 여행 다녀오느라 비상금까지 모두 말끔하게 털어버린 상태였다. 집안을 둘러보니 중고장터에 팔 만한 값어치가 있는 물건조차 안 보였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이 집의 명의는 아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내의 지금 모습이라면 이미 이 집도 어딘가에 팔려나갔을 확률이 높았다. 부동산에 전화를 돌려봐야 할 것 같았다.

  매수자인 것처럼 속여서 몇 군데 부동산에 문의를 해봤다. 다행인 걸까. 1312호 매물로 나온 물건은 없었다. 어쩌면 이 집은 나를 위한 아내의 마지막 선물일까, 혹은 배려일까. 나로부터 모든 걸 뺏지 않은 아내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우스웠다. 집 하나만이라도 남겨 놓은 것이, 마치 재기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아내의 배려가 너무나 감사해서 나는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 집을 어떻게 처분하는 방법은 없었다. 어차피 명의는 아내에게 있었으니까. 그저 이 집에서 잠을 자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달까. 그리고 언제든 이 집은 처분될 수 있었다. 그러니 안심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통장도 사라졌고 순금 돼지도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아침이 되니 불손하게도 배가 고팠다. 나도 모르게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그곳엔 아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내는 모든 걸 말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곳은 아내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냉장고에서 99.99% 두유 한 팩을 꺼내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깊은 곳에서부터 걸쭉한 것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탄수화물 함량이 낮은 미주라 통밀 비스킷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거북스러웠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두유 한 팩을 더 꺼내 쏟아부어도 소용없었다. 반쯤 먹다 남은 비스킷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역시 배가 고팠다. 호두 몇 개와 피칸 한 개, 그리고 아몬드 몇 조각을 씹었다. 딱딱하게 굳은 것이 잘 씹히지 않았다. 어금니가 뽑혀나갈 것 같았다.

  무력한 기분에 휩싸여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난 6개월 전에 권고사직을 당했고 3개월치 위로금을 받았으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실업급여도 받았다. 이제 새로운 시작에 나서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의 몸만 사라진 게 아니라 아내는 이곳에 남겨진 자신의 마음까지 챙겨버렸다. 나는 이곳에 빈 몸인 상태로 남았다.

  앞으로 어떻게 버틸 것인가. 냉장고에는 쌀 10킬로가 보관되어 있다. 시리얼 600그램짜리 두 박스도 있다. 냉동실에는 냉동된 깜빠뉴와 치아바타가 두 봉지 있다. 미주라 통밀 비스킷은 한 박스만 남았다. 라면은 한 번들 정도가 남아 있다. 먹을 건 이게 전부다. 이걸 어떻게 나눠먹어야 할까. 얼마나 조금씩 먹으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마치, 좀비가 세상을 정복해버려서 생존한 인간은 나뿐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비상식량을 조금 나눠먹으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면 다시 나는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편의점 알바라도 알아봐야 할까. 편의점 자리는 이미 20대들이 장악하지 않았는가. 그쪽은 내가 아무리 궁해도 침벌할 영역이 아니다.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할까? “어머니 아내가 가출했어요. 현금을 비롯한 모든 환금성 자산을 들고나갔어요. 다만 얼마라도 좀 빌려주세요” 이래야 할까. 다 큰 자식이 교통비 때문에 면접을 못 간다고 어머니에게 손이라도 벌려야 할까.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입맛이 쓴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원래의 루틴처럼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셔야 하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갈아놓은 원두가 다 떨어져 있었다. 냉장고 안쪽에서 새 원두를 꺼냈다. 그리고 싱크대에서 그라인더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그라인더 밑에 뭔가가 납작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내의 편지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역시 평범하지 않다. 아내는 늘 이랬다. 뭔가 클루 같은 것들은 집안에 숨겨 놓는 걸 즐겨 했다. 단순하게 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걸 혐오하는 편이었다. 인생은 수수께끼라고 그걸 푸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계급이 생긴다며, 나는 어느 쪽이냐며 수수께끼처럼 물건을 늘 숨기던 아내. 아내는 그라인더 밑에 힌트를 남겨 두었다.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아니 그것은 편지라 할 수도 없었다. 간단한 메모라고 부르는 게, 어쩌면 아내의 조롱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아내가 남긴 글은 이랬다.

  “이유는 묻지 말아 줘. 오랫동안 생각했고 고민하던 문제였어. 당신이 고의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권고사직을 당하고 나서 우리 집은 계속 어둡기만 했어. 그리고 5개월째 되던 날 당신은 독단적인 선택을 해버렸어. 혼자 여행을 떠난 거지, 여기 이 황량한 집안에 나 혼자 남겨놓고. 당신이 신나서 집에서 떠난 후, 당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했어.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20년 동안 직장 생활에 충실했으니 당신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겠지. 하지만 난 20년 넘게 난 이 집에서 혼자였다고.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이유 없이 삶이 공허해질 때 당신은 내 옆에 없었어. 당신은 늘 회사라는 공간에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열심히 일한 걸 원망하는 건 아니야.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버려졌다는 게 단지 슬플 뿐이야. 그래서 난 당신을 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도 버려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걸 느끼게 하고 싶었어. 난 그래서 당신의 모든 걸 뺏어버리기로 작정했어. 당신이 모아온 모든 현금과 패물까지 말이야. 퇴직금을 단기 금융 상품으로 옮겨 놓은 거 기억나? 한 달 전에 배당이 좋은 상품이 있다고 말했지? 그건 당신의 퇴직금을 뺏어오려는 내 수작이었지. 당신은 절대 의심하지 않더라. 20년 넘게 전폭적으로 나에게 신뢰를 보낸 만큼 당신을 속이는 일이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어. 아무튼 우린 끝났고 나는 당신을 버리기로 결심했고 당신의 모든 걸 앗아갈 작정이었거든. 그러니 이제 당신 혼자서 자립하는 게 좋을 거야. 옛정을 생각해서 냉장고에 먹을 걸 조금 남겨뒀으니까 그걸로 오랫동안 생존하길 바라. 아마 조금씩 나눠먹어야 할 거야. 식탐 절대 내지 말고. 그리고 경찰엔 알려도 소용없을 거야. 그들의 손이 뻗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날 테니까. 그리고 이건 우리가 20년 넘게 함께한 내 마지막 배려야. 냉동실 제일 아래 칸, 자반고등어가 담긴 비닐을 들춰보면 그 밑에 현금 백만 원이 있을 거야. 이게 내 마지막 선물이야. 당신을 위한 마지막 배려라고. 그 돈을 잘 아껴서 당신이 자립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겠어.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럼 아껴서 잘 쓰길 바라. 어디 최저시급이라도 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나 식당 서빙이라도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당신 자존심에 그런 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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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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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망

    0
    almost 3 years 전

    "소설입니다."를 읽지 않고 읽어 너무 놀랐네요! 그만큼 진짜처럼 재미있었다는 말씀드립니다.!

    ㄴ 답글 (1)
  • 열말

    0
    almost 3 years 전

    하필 자반고등어 비닐 안에... 대체 얼마나 밉보였으면...... ㅎㅎㅎ 언젠가 아내편도 한번 써주시죠.

    ㄴ 답글 (1)
  • veca

    0
    almost 3 years 전

    진짜 재밌고 실감나네요ㅎㅎ 왜그러셨어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ㅋㅋ아내편을 공심님이 쓰신다면 어떻게 쓰실까 궁금하네요 ᆢ사실은 내연의 남자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ㅋㅋㅋㅋ

    ㄴ 답글 (1)
  • Sunflower 🌻

    0
    almost 3 years 전

    소설 속 아내처럼 하고 싶은 날이네요.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겠어요~ 용의주도함이 부족해서 ㅠㅠ ㅋㅋㅋㅋ 예상보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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