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흙 덩어리가 반죽된 세계

2021.07.14 | 조회 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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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형, 나 요즘에 글이 통 안 써져. 깊이 생각한 끝에 책상 앞에 겨우 앉았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둥둥 떠다니기만 해. 그래서 뭔가 쓰려고 시동을 걸어도 그냥 미약한 시동에서 끝나고 말아. 부르릉도 아니고 부르? 쯤에서 끝나버리는 거야. 근데 그런 날이 지금 벌써 몇 달째야. 마치 입면 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쓰는 과정으로 진입 자체를 못하는 거야. 대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래? 그러면 네 지니라도 좀 불러 보지 그래?”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녀석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가며 그게 대체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할 소리냐며 마치 당장 주먹 한 방이라도 보낼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아니, 형 그런 농담하지 말고. 난 정말 심각하단 말이야.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도대체 작동을 안 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혹시 컨디션이 안 좋은가 싶어서 몸이 충분하게 쉬도록 배려까지 했단 말이야. 그 좋아하는 골프도 당분간 쉬기로 했고. 넷플릭스도 충동적으로 삭제해버렸단 말이야. 아예 뇌가 쓸데없는 시간에 자신을 소진하지 않도록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까지 했는데도 그게 안돼. 대체 영감이라는 게 원래 없던 것처럼 어디론가 떠나버렸냐고. 저 옷방으로 영감이 살금살금 걸어간 거야. 그리고 장롱 속에 처박아둔 무거운 캐리어를 몰래 꺼내 들고 자신을 그 속에 짐처럼 같이 가두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난 그게 의심스러워서 말이야. 자다가도 짜증이 솟구쳐 버리는 바람에 그 캐리어를 재활용장에 내다 버렸다니까. 갈 테면 가라고 난 떠나는 사람 절대 붙잡지 않는다고 말이야”

  “심각하네. 지금 말하는 거 가만히 들으니까 그 짜증과 불편함을 글로 쓰면 될 것 같은데?”

  “아, 이 형 진짜 왜 그래. 내 얘기가 그런 게 아니잖아. 난 지금 정말로 심각하다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빵 한 조각에 버터 발라놓고 커피 진하게 우려낸 다음, 베란다 앞에 앉아서 멍하게 바깥을 구경하는 게 그냥 요즘의 나야. 그게 전부라고 아무것도 없어. 그 속엔 이야기도 없고 사람도 없고 오직 잔해만 남은 커피 찌꺼기 같은 거뿐이라고 내 하루엔… 뭔가 쓰고 싶다는 욕망이 엄청나게 이 안에 잠재되어 있는데, 그걸 꺼낼 수가 없다고”

  “엄청난 입면 장애네. 네 말대로 심각해 보이긴 하네. 그렇다고 내가 딱히 처방전 같은 걸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냥 나는 여기 앉아서 네가 사주는 1,500원짜리 커피 한 잔 공짜로 마시는 대가로 네 고민을 진지하게 때로 시큰둥하게 듣는 게 전부야. 미안하게도 말이야.”

  “형은 그럴 때 없었어? 어디론가 빨리 가야 하는데, 그곳에 도착해야 될 이유는 분명한데, 못 가는 거야. 어떤 이유도 없어. 그냥 기차가 연착되는 것처럼 혹은 잘 달리던 지하철 전동 도어에 문제가 생겨서 닫히지 못하는 바람에 출발하지 못하는 거, 그런 교착 상태 말이야. 누군가가 내 삶을 봉쇄시키려 드는 거야. 말하자면 외압 같은 게 다가오는 거지. 근데 그게 보이지 않아. 근데 분위기로는 심각하게 느껴져. 막 다가오는 게, 내 숨통을 조여 오는 게 느껴진단 말이야.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저 도착지 끝에 가 있어. 이미 몸과 마음이 서로 갈라선 거지. 이별한 거야. 한쪽은 도망갔고 한쪽은 여전히 애타게 기다리는 상황, 그게 이해돼?”

  “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네가 심각하게 외상을 입었다는 건 대략 알 것 같아. 그 문제를 먼저 진단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어떤 시점에서부터 글이 잘 안 써졌는지. 그 시점으로 한 번 되돌아가 보는 거지. 혹은 그 시점이 모호하다면 어떤 순간을 떠올려 보는 건 어때? 난 그럴 때 주문처럼 어떤 시절을 떠올리려고 해. 내가 그곳에 현재 실존하지는 않지만, 과거 어느 시점에서는 그 공간에 위치했으니까 난 그 시간 속에 편입되는 게 가능해지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흐음… 잘 모르겠어. 자세히 설명 좀 해줘 봐. 형은 글도 잘 쓰지만 실용적으로 써먹게끔 설명도 잘해주잖아.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좀 해줘.”

  “음, 알았어. 그럼 차근차근 잘 들어봐. 내가 네가 겪은 그런 비슷한 스트레스를 겪을 때 어떻게 그 상황에서 탈출하는지, 어떻게 모면하는지 비결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야기해볼게.” 그렇게 말하곤 나는 내가 어떻게 창작의 고통, 영감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복구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젠가였을까. 아무튼 글쓰기에 외상을 입은 사람처럼 고통에 지나치게 집착하던 날이었어. 도대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도 없고 상상력도 모두 고갈되어버리고, 그냥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느낌이 들더라. 난 그때 알았지 나는 고통과 꽤 친한 사이가 될 거라는 걸. 그 순간 나는 이유 없이 과거로 이동되었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야. 누군가 내 손을 잡고 그러니까 아주 온기가 가득한 손이었어. 소녀의 손등에서 풍기는 부드러운 감촉 같은 거였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그 손에 이끌렸지. 그리고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 여행을 떠났어.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빠져들었지. 과거 속으로 그 과거의 또 다른 과거의 깊은 우물 속으로 더 깊은 상념 속으로 내가 배치된 거야.”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얼마큼 걸렸는지도 잘 모르겠어. 눈을 잠시 감았고 눈을 어느새 떴더니 컴컴하고 작은 공간에 내가 놓여있었어. 눈이 빛을 흡수하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리긴 했지만,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었어. 어둠에 적응할 무렵 내가 속한 곳이 어딘지 알게 되었어. 그곳은 내가 6살 때 늘 숨어들던 내 책상 밑이었어. 난 그곳에 도착했던 거야. 난 어릴 적, 어딘가로부터 이유 없이 도망치고 싶을 때, 책상 밑으로 숨어들곤 했어. 근데 그 낯선 책상 밑이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만큼, 그러니까 빛의 영향권에서 멀어질 만큼 어둡진 않은 거야. 뭔가 조치가 필요했지. 난 이불을 책상 위에 덮고선 다시 의자 위에 그걸 걸쳐놓았어. 그렇게 하니까 그럭저럭 평화가 찾아오더라.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모양도 질감도 아니었어. 다른 방법이 필요했던 거지. 그때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어. 네가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영감의 한 형태였을지도 몰라. 아무튼 지금 생각하니까 그건 분명 영감이었어. 모양도 냄새도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몰랐지만 그건 영감처럼 생겨먹었던 거야.” 나는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고 계속 얘기했다.

  “그 영감이 무엇이었냐 하면, 우리 집에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이 있었거든. 총 50권인가 60권인가, 그건 분명치 않아. 중요한 정보도 아니고. 아무튼 그걸 책장에서 모두 빼냈지. 물론 그걸 읽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나에겐 방어수단이 필요했던 거지. 말하자면 그 책들은 나를 막아줘야 했어. 그걸 한 권씩, 6살짜리가 얼마나 힘이 있었겠어. 한 권 혹은 두 권 정도를 들고 책상 앞에 쌓아놓기 시작했지. 몇십 권 정도를 쌓아놓으니까 그럭저럭 책상 입구를 봉쇄할 수 있겠더라. 빛 한 줄기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독립적인 공간이 만들어진 거야. 나는 그 속에 기거했지. 몸을 동그랗게 수축시켜 놓고 고양이처럼 고개를 무릎 위에 파묻었어. 그리고 눈을 감았지. 한동안 눈을 감다 뜨면 그냥 계속 어둠이더라. 난 그 어둠의 한가운데, 어쩌면 흑점에 불과할지도 모를 그곳이 너무 반가웠어.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그 어둠의 점들이 내 손안에 가득 분포했던 거야. 감격스러웠고 뭔가 충만해지는 느낌? 뭔가 계속 차올라서 그걸 바깥으로 해소해버려야 할 것 같은 느낌? 아무튼 뭔가 치밀어 오르는 거야. 그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내 손은 뭔가를 도모해. 뭔지 알아?”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 잘 어울리는 건 바로 찰흙이야. 칠흑과 찰흙 뭔가 이질적이면서도 어울리는 느낌이 들지 않아. 물론 그건 아주 빳빳하게 메말라버린 찰흙이었지. 무엇의 원형이었지. 또한 무엇으로든 변형이 가능한 그러니까 어떤 것이든 제작이 가능한 세계였지. 나는 문방구에서 구입한 그 찰흙 덩어리를 비닐봉지에서 해방시켰어. 그러니까 그걸 바깥에서 숨 쉬도록 꺼내 든거지. 물론 내 손도 찰흙도 모두 말라 있었지. 비틀어져 있었어. 또한 뒤틀어져 있었어. 그건 한없이 딱딱하고 빈틈없을 뿐이었어. 아무리 녀석의 질감을 느끼려고 해도 우린 각자의 라인에서 각자의 끝만 바라보고 있었던 거지. 그러다 나는 책더미를 슬쩍 밀어내고 플라스틱 컵에 물을 조금 담아왔어. 많이 담았다가 어딘가에 흘리기라도 하면 엄마한테 혼쭐이 나거든. 물론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미래의 내가 야단맞는 상황을 생각하니까 극단적으로 나는 조심성 있게 굴 수밖에 없었어.”

  “플라스틱 컵에 물을 조금 담아서 책 더미를 지나 다시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왔지. 그리고 책 더미를 힘겹게 안쪽으로 끌어당겼어. 그랬더니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 칠흑 같은 어둠. 내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 그런 존재 없는 어둠. 무엇이든 구분하는 거 자체가 의미 없는, 내가 지워질지도 모를 어둠이 몰려왔어. 한달음에 긴급하게 배달된 것처럼, 나를 환영하듯 다시 찾아오고야 말았지. 나는 그 찰흙 덩어리를 더듬어서 찾았어. 멀지 않은 곳에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지. 소녀의 부드러운 온기 같은 건 물론 아니었어. 나는 손가락 끝으로 손바닥 전체로 녀석의 질감을 찾았어. 역시 5분 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 난 왼 손에 물을 조금 흘렸어. 그리고 찰흑을 만졌지. 찰흙의 반응을 천천히 기다렸어. 녀석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지. 내 손은 어느 순간 찰흙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어. 까만 어둠과 찰흙의 진한 어둠과 빛이 더 이상 반사되지 않는 내 손의 어둠이 같이 반죽이 됐지. 어쩌면 나는 내 것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난 찰흙에 나를 녹여버렸어. 그 순간 기억 같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때 그 무심한 시간에서 깊은 안식을 발견했어. 그때는 세상의 어떤 고통도 내 것이 아니었다고. 오직 찰흙과 내손이 만든 반죽덩어리만 그곳에 있었으니까.”

  “나는 계속 무언가와 합쳐졌어. 시간에 용해된 것인지, 조각난 건지, 분해된 건지 알 수 없었고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 건지조차 분간할 수도 없었어. 하지만 난 찰흙을 아니 찰흙과 내가 빚어낸 세계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그러니까 영감이 스스로 출발해서 나를 어딘가에 안착시켜준 그 동기, 흐름 그리고 그 어둠 속의 최종적인 나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나르키소스적인 행위였지. 그것이 그때는 통일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영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긴 해."

  "시간이 지나서 영감의 설득력이 떨어질 때면 나는 과거의 책상 밑 어둠 속으로 이사를 가지. 거기서 내 보금자리를 만들어놓고 아무도 침범할 수 없다고 선포를 해. 그리고 나는 주머니 속에서 찰흙 덩어리 원본을 꺼내. 그리고 물을 묻혀. 아주 조심스럽게 표면에 물을 바르는 거야. 그리고 반죽을 시작하지. 꾸덕꾸덕 손과 찰흙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의 밀도를 조절해가며 찰흙의 질척거림을 피부에 당겨가며, 메마른 것과 물기가 가득한 세상을 조율해가며, 나는 현재의 나를 버리고 과거의 나를 살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굳이 영감이라는 걸 억지로, 인위적으로 되살리지 않아도 그냥 찾아오더라. 그런 감각과 소통을 하는 거지. 아니 어쩌면 일방적인 대화일지도. 아무튼 그때가 되면 베꼈어. 그냥 받아쓰기만 잘하면 돼. 나는 받아쓰기는 늘 1등인 편이었거든.”

  “그게 내가 전해줄 이야기의 전부야. 내가 영감을 되찾아오는 법, 언제든 녀석을 내 앞으로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이지. 정리하자면 네가 원하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다시 이야기를 해본다면, 영감의 정체는 책상 밑 고요한 어둠, 그 속에 깃든 찰흙 덩어리, 어둠과 찰흙 덩어리가 뒤섞여서 반죽된 세계라고 볼 수 있겠어. 이게 전부야. 이제 네 손에 묻은 찰흙 덩어리를 떼어 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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