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지 않는 계단 #5

나눠진 시간

2021.07.09 | 조회 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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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 나눠진 시간

  일어나 보니 오후 2시였다. 창밖엔 어느새 태양이 경계선 끄트머리로 달아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넉 달이 넘도록 나는 각성 상태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것도, 시달린 게 아닌 녀석에게 적절한 도움까지 받았다. 그 불면증이란 것은 내 인생에 지극히 유익한 작용을 했고 남은 인생에서 잠이 제외되더라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원하지 않은 의식의 멈춤 상태가 갑자기 찾아와 본래의 자리를 밀어내고 대신 주인 행세를 해댄 것이다. 이유 없이 찾아왔다, 이유 없이 떠나는 방랑객처럼 불면증은 문득 나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어제저녁부터 오늘 오후까지 시간은 스스로 12개의 계단을 밟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골든브릿지 꼭대기에서 번지점프하다 어떤 구간을 망각해버린 겁쟁이처럼 나는 12초도 아닌 12시간 동안 시체의 형상으로 번지 점프를 한 셈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연거푸 상승과 추락을 거듭해가며.

  그 누구도 나를 흔들어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여기서 12시간이 아닌 120시간을 잔다고 해도 관심 가져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난 철저하게 타인을 외면하고 무시하며 고립된 삶을 자청해왔으니까. 그게 4개월 동안 나름 깨달은 생존 방식이었니까. '그 누구와도 연결되고 싶지 않다. 나는 오직 고독을 원한다.' 나 스스로 버려짐을 선택한 것이다.

  왼쪽 뺨이 유난히 얼얼했다. 거울에 비쳐 보니, 뺨 전체가 링에서 카운터펀치를 한 대 얻어맞고 수건을 던져버린 복서의 패배의 상징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수면에 빠져든 그 모양 그대로 전혀 자세를 바꾸지 않은 듯했다. 특별하게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깊은 무의식의 세계, 완벽한 혼탁의 세계, 무질서와 변칙의 도가니 속으로 얼마 동안 고립되었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쩌다, 원인 불상의 이유로 그곳에서 겨우 탈출은 성공했으나 전혀 개운한 맛은 없었다. 입맛이 비교적 썼다. 벌레 한 마리를 씹다 삼킨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신은 비교적 온전했으나 신체는 그렇지 못했다. 뼈마디 하나하나에 목공 본드를 발라놓은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삐거덕 소리를 냈다. 뼈와 근육들이 더 이상 지탱할 자신이 없다며, 몇 십 년 동안 맞춰놓은 균형을 동시다발적으로 무너뜨릴 태세였다.

  관자놀이 부근을 두 손으로 감싸다, 빈 공간을 찾아 눌렀다. 원인을 분석하려 했으나,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뒤져봐도 떠오르는 것이라곤 완벽한 검은색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메일을 열었다. 의식 없이 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마침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메일의 작성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었다.


제목 : 나눠진 시간

어때? 오랜만에 잠을 맛본 소감이 어떤지 참 궁금하군그래. 내가 특별하게 보내 준 선물이니까 감사하게 챙겼으면 좋겠고, 앞으로 여러 일들이 생길 테니까. 부정할 생각 말고 그냥 잠자코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아, 참 내가 누구인지 소개를 안 했군. 뭐라고 나를 소개해야 할까. 나는 사람들의 의식이 닿지 않는 세상에서 대기하는 입자라고 정의해두지. 이름은 그냥 더스트라고 불러. 입자라고 하니까 어떤 과학적인 체계를 가질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우린 인간의 상상력의 범주를 뛰어넘는 상상력 바깥쪽의 존재들이니까. 내가 존재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우리가 일정하게 한 곳에만 있거나 가끔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야. 우리는 말 그대로 입자처럼 공기 중을 떠다니는 다수의 형태로 어디든 기거하지. 하지만 우리의 생은 지극히 짧아. 인간의 시간으로 말이야. 그러니 우린 대상을 찾아야만 해, 잠시 깃들 수 있는 말하자면 의지할 대상, 전이될 숙주를 찾지. 숙주라고 하니 바이러스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우린 바이러스와 달라. 녀석들은 숙주와 고생하게 만들잖아. 그런데 우린 공생이라기보다는 거주의 대상으로 인간을 물색해. 오랫동안 공간을 찾아 헤매다 결정이 되면 감시를 시작하지. 일거수일투족을 거의 모든 생활 반경을 들여다봐. 엿본다고 볼 수도 있겠군. 그러나 영향을 미치진 않고 오직 보기만 하는 거지.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진입로가 발견이 되는 거야. 연결 통로, 점이라고 볼 수 있겠지. 오직 우리만이 통과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만들어지는 거야. 우린 그 순간을 포착했다가 뛰어드는 거고. 나도 딱 맞는 상대를 찾았지.

그게 바로 당신이었어. 당신은 몇 달 동안 미션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했어. 단 한 1분도 자지 않고 4달을 용케 버텼더군. 좋았어, 시험대를 제대로 통과한 거야. 한 편으론 꽤 신기했어. 그런 인간을 찾아보기 힘들어 요즘은. 우리도 먹고살기가 꽤 힘들어졌지. 아무튼 당신이 선택된 거야. 어쩌면 당신이 나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런 것에는 딱히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어. 어쨌든 우린 계약을 맺었고 이제 자기만의 영역을 곤고하게 구축해나가야 할 거야. 이건 싸움이라고 봐야 할까.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싸움인지, 싸움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패배하는 쪽이 이 세계에서 영원히 물러날 거라는 건 분명해.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할 거야. 난 시시한 싸움은 싫으니까. 균형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우린 정당한 싸움을 하게 될 거야. 한 쪽이 나머지 한 쪽을 밀어내는 싸움,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하는 그런 모순적인 혈투가 벌어지는 거지. 물론 피는 흘리지 않아. 진하게 피를 흘리는 광경만 상상하면 돼. 누가 이길지 흥미진진하지 않아? 기대되지 않아?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자리를 교대하는 건 잠에 빠져드는 방식이 될 거야. 그 부분이 궁금했지? 너는 12시간 동안 잤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전혀 잠들지 않았어. 잠시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의식이 몽롱해졌을 뿐이야. 너는 그게 잠든 것이라고 착각했겠지. 그건 일종의 주술 의식이라고 보도록 하자. 너희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 건 역시 힘들어. 너희들의 언어는 너무 형용하는 것들이 많아. 좀 더 직선적으로 의사를 표시해 주면 안 될까? 우회적인 것들은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정리하자면 우린 앞으로 12시간을 교대로 사용하게 된다. 너는 너지만 때로 네가 아니게 된다. 졸음이 밀려오면 어디든 잠들어야 한다. 이게 규칙이야. 규칙을 어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어. 아마도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야. 네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질 테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해. 이건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겨. 그 유통기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즐기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라캉이 그런 말을 했지. 삶은 끄덕끄덕 졸다가도 어느 순간 깨어나고 또 모순적이게도 끄덕끄덕 졸게 되는 거라고.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끄덕끄덕 고개를 아래위로 왕복운동을 하면서 졸게 되더라도 그것을 억지로 부정하려고 하지는 마. 그냥 인정하라고. 내일 또 보자고. 내일은 바깥에 나가볼 생각이야. 넌 주로 사무실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더라. 나는 입자로서 혹은 개념적으로서만 존재해왔다 보니 세상을 인간의 시각으로서 구경해보고 싶어. 밖에 나가서 무엇이든 해볼 작정이야. 기대해봐. 어떤 일들을 실행했는지 알려줄게.

그럼 이만 총총

더스트로부터


  12시간을 나눠쓴다. 내 몸뿐만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나눠쓰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두 개의 조각으로 쪼개진다는 의미인가. 갑자기 몸 중앙 어딘가에서 모험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모험, 입자와 대결해야 하는 기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녀석은 나를 선택했고 내 영역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부분이 아닌 반을 정확하게 갈랐다. 그래서 나는 몸 가운데가 찢어질 정도로 아프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메일은 분명 내가 발송했다. 이 계정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한 번도 내 계정은 해킹 당한 적이 없다. 녀석이 내 안에 12시간 동안 들어와있었다면, 그 시간 동안 내가 잠들 것이 아니었다면 난 뭘 하고 다녔을까. 아니 내가 아닌 더스트는 대체 뭘 하며 나를 소모했단 말인가.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인간이 화성에 기지를 건설하는 세상이다. 우주를 향해 도약하는 시대에 고유한 내 정신을 탐하는 존재가 있다니 이게 말이 될까. 오랜만에 잠든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장난치는 게 분명했다.

  사실, 견딜 수 없었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장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잠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걸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은 통제 바깥에 분명히 놓여 있었지만 4개월 동안은 내 통제권 내부에 속해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믿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잠 정도는 영영 사라져 버려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신뢰하던 녀석이 갑자기 떠나버렸다. 그리고 의문의 존재가 앞으로 내 몸을 정복하겠다고 선전포고를 보내놓곤 곧바로 사라졌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걸까.

  그날 이후, 나는 6시가 되면 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고 어디에 있건 곧바로 잠들어야 했으며 깨어나면 잠들었던 장소에서 단 1밀리미터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 행위는 빈틈없고 치밀하며 아주 정교하게 작동됐다. 시작한 곳에서 마무리한다는 개념. 마치 연어가 제 고향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가듯 나는 그렇게 계산된 양식을 반복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2시간뿐이었다. 24시간 동안 처리하던 일을 단 12시간 내에 해치워야 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게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각성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30분은 걸렸다. 나는 동면에 빠져들었다 깨어났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매일을 보내는 운명을 맞았다니, 대체 무엇이 내 삶을 이렇게 트리거 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시체처럼 하루 12시간을 무의식 상태로 보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깊은 잠을 자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자다가 어느 순간 불쑥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었으니까. 몽유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대낮에 내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는 사실, 심지어 누군가와 오늘 날씨가 어떻고 미세먼지가 어떤지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고 카페든 식당이든 멀쩡하게 돌아다녔다는 사실,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굴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돌변했다는 사실, 그러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듣는다는 거 자체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어느 쪽이 내 본질과 더 가까운 것일까. 나는 왼쪽으로 기울까. 오른쪽으로 기울까. 그러니까 12시간으로 나누어진 분량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나일까. 나는 늘 오른쪽만 고집하는 사람인데, 그쪽은 비교적 불편하고 불친절하고 냉혹한 세계였는데, 그 선택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어쩌면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나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의 내가 아닌 다른 인격 그러니까 더스트가 담당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본질적인 인격 그러니까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던 바로 나, 두 개의 서로 상반된 인격이 내 삶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이것은 공정한 싸움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정복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내가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 잠식당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더스트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팽창 중이었으니까. 따뜻한 태양처럼 몸집을 점차 부풀리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어느 쪽이 살고 죽는지 결정한다 해도, 사실 둘 다 이기거나 지는 싸움인데, 두 존재는 서로의 자존심을 놓고 서로를 패배시켜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그리고 내가 깨어있는 동안 문제의 그 엘리베이터가 내 경계선 내에 새롭게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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