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의해 분해된 삶

2021.06.23 | 조회 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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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 소설입니다.

  어제 아내의 장례식을 마쳤다. 아내는 삶의 마감을 스스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왜, 왜 그래야 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이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 못 할 것들이 삶에 어디 한두 가지 일인가. 아내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주 간단하게. '시작은 내가 선택하지 못했지만 끝은 내가 선택하고 싶어'라고. 그 간단한 말로 아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그래야 했는데.'

  나는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살아갈 이유란 것들이 모두 타버렸기에 내 몸은 스스로 제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나는 인공적인 기술에 도움을 받아 하루를 연명했지만, 내일은 아마도 오늘보다 더 절망적일 거라고 예상될 뿐이었다. 이곳에 남아서 삶을 이어나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의보다는 그러니까 아내처럼 삶을 끊어낸다면 그 결단이 가능한 장소에 가야 했다. 아내가 삶을 마친 이 집이 아닌... 마치 미세하게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내 용기를 누군가 응원해 줄지도 모르니. 절대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믿음은 추락했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나마 건져야 할 선택은 명료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을 뛰어넘어 실행으로 옮겼다. 검게 그을린 도시를 떠나며.

  떠나야 했는데, 이 아파트에서는 한순간도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함께 살던 아파트는 생명이 숨 쉬어야 할 어떤 마땅한 권리마저 빼앗고 있었다. 나는 어떤 생각이든 모조리 여행 가방 속에 묻어두며, 마치 가방이 아내의 무덤인 것처럼 모양을 만들어 나가며 언제든 떠날 채비를 끝내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무거운 짐 따위는 굳이 필요 없었다. 욕망이 더 이상 발을 디딜 틈조차 없는 곳, 성역의 종착역에서는 욕망의 찌꺼기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할 테니.

  나는 수평선 너머로 지독하게 파란 선이 아름답게 이어진 바다 어딘가에 섰다. 시선을 깊은 바닷속으로 옮겨도 고인 한(恨)이 풀리지 않은 탓일까? 나는 여전히 그곳에 붙들려 달아나지 못했다. 마치 신념이 엉켜버려 박제될 것 같았다. 몇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앞과 뒤에서 지나갔지만, '의미 없는 일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라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에겐 1밀리미터의 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를 따라 길게 늘어선 모래숲 근처를 걸어 다니면서도 나는 한가로운 빛의 질서에서 소외되는 듯했다. 나는 공기보다 무거운 티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으로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기 시작했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아내에게서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내 눈앞에 실존했기 때문에.

  그때였다. 어떤 에너지가 태동하기 시작한 걸까? 바다가 어지럽게 출렁거렸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어떤 신비한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내 가슴에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파도가 스스로 놀라 잠든 생명을 깨운 것일까. 나를 둘러싼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바다, 그리고 고요함을 깨우는 갈매기의 소란스러움. 이곳을 선택했으니 나는 머릿속의 말뚝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진정한 나, 나라고 규정해온 뿌리 깊은 조직, 타인에 의해 분해된 삶을 오늘 재구성하리라.

 

또 하나의 계절이 생을 마치는 새벽 나는

지구의 찬바람 가운데를 서성이며

한철 사랑했던 얼굴을 그려본다

 

본다는 것은 생각이 낳은 착각일까

실컷 사랑했으니 후회 따위는 없다는 말

그런 거짓말, 절대 소화되지 못하는 말

 

꾸역꾸역 떠넘겨버리다 밖으로 내뱉고 마는 말

못다 한 나머지 그 후회거리들을 떠올리는 일

그런 일은 떠나버린 옛사랑을 잡으려는 일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일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검은 머릿결

가슴속에서 울렁거리는 파도 줄기

고달프고 아파서 나는

무너지듯 모든 걸 잊고야 만다

 

  누군가와 삶을 오랫동안 나누었고 인생을 다른 사람과 공유했던 사실을 떠나보냈다. 그늘조차 없는 따가운 해변에 홀로 서있다는 것은 나에게 과연 현실일까. 나는 잃은 것이 많은 남자였지만,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부유한 찌꺼기들을 버릴 수 있었으니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운명을 맞을까. 어지럽게 바다를 돌고 돌았다. 햇살이 참 눈부시다는 기억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붉은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내가 나무 의자와 마주친 것은 이곳을 몇 시간 동안 떠돌다 맞은 황혼 무렵이었다. 나무 의자는 마호가니 무늬로 빛이 났다. 바닷가 너머를 응시하듯 의자는 한 곳으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엄숙한 기운이 서린, 오래된 노인의 점잖고 평온한 얼굴, 낡았지만 도리어 격조 있는 그런 품격은 내가 경외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내가 바라보는 바다와는 별개로 나무 의자 속에 품은 바다의 형상은 어떨지 무척 궁금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을까? 저 벤치는… 나도 저렇게 세상과 완벽히 차단된 채, 차라리 의자처럼 무심하게 앉아있는 건 어떠려나. 

 

"잠시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널린 것이 빈자리인데 뭘 고민해?" 파도에서 말 하나가 씻겨 내리더니 내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회색의 백사장에는 마호가니 빛 나무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내 스스로 내뱉은 말이겠거니 짐작하며 슬그머니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는 기묘한 심연의 고독 같은 것이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삶과 죽음 사이를 미묘하게 가르는 듯했다. 의자에게는 무심한 세월을 보낸 후, 혼자 남은 인간의 지독한 고독감과 비슷한 것이 서려 있었다. 의자와 바라보는 곳으로 나도 시야를 쏘아보냈다. 청록색의 마지막 색채, 아쉬운 듯 저물어가는 태양의 꼬리가 바다를 집요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꼬리를 차분하게 따라가던 붉은색의 기운이 처량하게 검은색으로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무엇을 그리 바라보는 걸까?"

"자네는 별게 다 궁금하구먼……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으니깐 보는 거지,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자네가 보다시피 우리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지 않은가…… 뭐 그거밖에 보이는 게 더 있겠는가. 모든 것이 아득해져 가는 낡은 인생에게 말이야."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누구지? 누가 대답을 한 거지? 고개를 돌려봤지만 바다와 나, 그리고 작은 나무의자뿐이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시 깊은 적막감이 찾아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의자의 표면을 쓸었다. 어쩌면 멕시코 어디쯤이 태생일지도 모른다. 한 노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나머지 힘을 끌어모아 이 의자를 작업한 것이다. 그는 아마도 수십 미터는 됐을 법한 나무를 도끼질하고 자르고 손질하고 윤기를 내며 몇 날 며칠을 몰두했을 것이다. 그의 오래된 작업실, 그의 낡은 도구들, 그것들을 최대한 가동하여 생애 마지막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엔 노인의 영혼이 담겼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아무 연관성이 없는 이곳으로 당도했으리라, 왜 그렇게 된 걸까. 나는 다시 나무의 재질과 모양새를 세심하게 살폈다. 세월의 흔적을 거부할 수 없었지만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노인의 말쑥한 옷차림과 비슷했다. 나는 그 빈틈없는 모습에서 노인이 살아왔을지도 모를 세월의 정갈함, 인격, 지혜, 해탈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 먼 곳까지 제 발로 찾아온 걸 보니 자네에게도 말 못 할 이야기가 숨어있는가 보구만. 대개 이런 구석진 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어떤 기운에 전염된 경우도 많고. 그 선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변화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말이야…… 자네도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지는 않는가?" 노인이, 아니 의자가 단정하듯 말했다.

"스스로에게서 열쇠를 찾을 수 없는 건 이해하지만, 이런 오래된 바다와 모래만 가득한 곳에서 대체 무얼 찾겠다고 찾아들 오는 건지. 번잡스럽고 귀찮다니깐…… 이맘때가 되면 하여튼 간 한두 사람쯤은 꼭 나타나서 조용한 공기를 이리저리 들쑤셔놓고 다닌다니깐…… 결단을 내릴 용기도 없으면서."

 

  나는 자포자기한 채, 죽은 노인의 영혼인들, 아직 살아있는 나무의 환영인들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혼자 지껄였다. "뭐. 사람 누구에게나 세상 끝,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모험을 떠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는 거 아닐까요?" 이렇게 말 해놓고도 대체 이 말을 누가 듣는단 말인가 생각했다.

 

"그럼 자네도 이 시골 무지렁이 같은 마을에서 무슨 모험이라도 한 번 해보겠고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보아하니 사는 게 멀쩡해 보일 것 같은 친구가 말이야. 이런 곳에서 고독감을 맛보겠느니, 깨달음을 얻겠다느니, 죽음을 선택하겠다느니, 그딴 부질없는 울부짖음이라면 그만하게나. 내 보기에 자네에게는 기름칠이 더 필요하겠구먼"

"행여나 나에게 무얼 묻겠다고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라네. 자네가 보기에 내가 인생을 다 살아서 깊은 깨달음을 얻은 늙은이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곳에서 매일 찾아야 할 것이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다가 아름다워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라네."

"죄송하지만, 아까부터 어르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리 바라보고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허허…… 재미있는 친구로구먼. 다 헐어빠진 늙은이가 바라보고 있는 게 무엇이겠나. 그저 하늘과 맞닿은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거지. 나와 같은 시간 개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체계에게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저 바다를 보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가벼워진다고 할까. 마치 날개를 펴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분이 드는 거지. 내가 먼 수평선 너머에 닿을 힘은 없어도, 느낄 수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그곳에 눈길을 준 것뿐이라네……"

 

  그때였다. 갈매기들이 둥지를 향해 돌아갈 때쯤이었다. 등대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난 것은 어둠이 내려앉은 후, 밝게 빛나는 불빛 때문이었다. 등대는 지나가는 어선들에게 직선으로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참 대견하지 않은가? 저 빛을 밝혀주고 있는 등대 말일세. 저 친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시간에 길을 안내한다네. 내가 이곳에 정착한지 오래전부터 한결같지."

 

  나는 노인인지 의자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의 말끝을 따라, 등대가 비치는 방향을 응시했다. 천천히 원을 그리는 등대가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인생을 끝내겠다고…… 빛이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겠다고 홀로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노인 하나와 등대가 홀연히 나타나 그림자에 묻힌 내 비굴함을 들추어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의자에 묻은 모래를 깔끔하게 털어냈다, 마치 마지막 예의를 갖추듯.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곳은 의자가 바라보는 저 방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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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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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flower 🌻

    0
    almost 3 years 전

    긴 글입니다..어제는 70번 국도에서 오늘은 바닷가에서...... 잘 읽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니요. 그래서 다음 주제가 연명에 관한 것일까요? 죽음학을 공부해야 하나 봅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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