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뭐가 그리 다 선명하고 확실했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적어내라던 인적 사항 종이에 늘 있었던 특기란과 취미, 장래 희망 칸은 나에게 그다지 고민거리가 못되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을 믿고 있는지 늘 확실했던 어린이였다.
다섯 살 때부터 배웠던 바이올린을 평생 들고 전 세계를 순회하는 연주자가 될 줄 알았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더블비얀코인줄 알았다. 일요일에 교회를 안 나가면 지옥에 가는 줄 알았고,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해서 아이는 다섯 정도는 낳아야 당연하다 생각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 가족은 한 건물에서 각기 다른 층을 하나씩 차지하고 살아가자고, 그렇게 동생들과 약속하곤 할 때 아빠가 장난스레 그 약속 꼭 지키라며 다짐시키는 일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건데 왜?
나이를 먹고 세계를 살아가며 믿음과 신념이 깨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20대는 늘 그랬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청소년은 정규 교육의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도달했다.
하고 싶어서 들어갔던 전공학과의 수업은 좋아하는 공부보단 안 좋아하는 공부가 더 많았고, 좋아서 시작했던 동아리도 제 발로 도망쳐 나왔다. 친했던 친구들은 만나는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고, 좋아했던 음식점은 방학을 보내고 나면 금세 사라지고, 늘 신입생일 줄만 알았던 대학 생활은 대학 이후의 진로를 준비하는데 치여 쏜살같이 사라졌다.
생각보다 더 자신을 몰랐던 청년은 대학을 졸업한 뒤 또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펼쳐질 남은 인생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게 될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을 다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걸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은 끝났다. 이미 그러한 맹신으로 도전했던 일들에 배신당한 경험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든 게 확실하게 느껴지던 때는 살기 편했지만, 한편으론 무지하고 순진하며, 누군가에겐 폭력적이기도 했으리라.
사실은 잘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쉽게 많은 것을 확신하며 살았을 때는 쉬웠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지극히 자신만을 위하는 삶의 태도였다. 그러므로 타인과 공존하며 사는 일이 불가능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아니고, 연차가 늘었다고 다 선배답게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보내온 시간에 걸맞은 성숙함과 능력이 있나. 나이와 연차와 상관없이 미성숙한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과 나 사이에 차별점을 두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결국엔 성숙함이 그를 어른답게 만든다. 그건, 삶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해서도. 삶은 모두에게 불확실하다. 분명한 건 시간은 멈춤 없이 흐르고 있고, 모두에게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사실이다.
불확실한 세계 속의 일원으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런데도 쉽게 변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눈에 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다. 더블비얀코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중 하나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글공부는 계속한다. 연락이 끊긴 사람도 있지만 새롭게 만나게 된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사랑을 확신하고, 그것을 약속하며 살아가는 일은 그래서 때로 두렵다. 내게 그것을 지켜낼 만큼의 힘이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세계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랑은 이렇게나 불확실함의 존재를 알고도 이뤄졌던 걸까.
이제는 쉽게 내 앞에 펼쳐질 것들을 확신하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그마저도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나도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 분명하게 느끼는 건, 이렇게 불확실함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좀 더 찬란해진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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