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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수필] 네가 웃으면

2025.06.30 | 조회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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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고등학생 때 한문 선생님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코미디언은 정말 똑똑하고 멋진 직업이라고, 사람의 웃음을 만드는 일은 아주 놀랍고 고귀한 일이라고. 선생님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학업 성적과 대학 순위로 모든 것을 평가했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웃음이 뭐 대수라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으면 기분이 별로였다. 나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더 굳은 표정을 하거나, 쉽게 웃지 못할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나 약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를 보호하는 거라고 착각했다.

웃음은 나와 어울리지 않고, 더구나 나는 눈물이 많은, 우는 것이 더 쉽고 가까운 사람이라 여겼다. 그게 경직되고 긴장한 모습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냥 그게 나의 모습인 줄 알고 살았다. 웃는 것마저 누군가에게 허락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대학 시절을 보내고, 사회생활을 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오랜만에 봤다. 주인공 귀도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아들 조슈에를 안심시키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걷는다. 그의 얼굴엔 조금의 공포나 두려움이 없다. 죽음 직전의 그 모습을 숨어서 본 아들은, 아빠가 그랬듯 자신도 웃는다. 그들은 웃는 얼굴로 이별한다.

어떻게 참혹한 전쟁 중에 결국은 누군가 죽고 말았는데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제목을 지은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은 죽었는데, 심지어는 사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다 죽었는데. 조슈에는 나중에 아빠가 죽었다는 것을, 게임이라던 설명은 다 거짓이었고 사실 그곳은 수용소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은 연애 시절에도 종종 유치한 장난을 쳤다. 나는 농담을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지만, 끊임없는 웃음 공세에 당할 재간은 없었다. 남편의 능력은 부부가 된 후로도 여실히 발휘되어서, 간혹 나와의 대화가 싸움으로 발전하기 전에, 혹은 싸우고 난 후에 늘 분위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그였다. 분위기를 환기하는데 최고는 웃음이다. 그는 실없는 농담이나 가벼운 스킨십으로 웃음을 끌어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무거운 감정에 짓눌려 있다가도 그가 건네는 가벼운 말이나 손짓에 툭, 무장해제다.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심각하고 답답했던 공기가, 와르르 웃어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진다.

 

언제부터 내가 웃음을 어색하게 여겼는지 모르겠다. 남들을 웃기는 재주가 내게는 없고,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나도 유머를 잘하고 싶단 푸념을 했더니 어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그건 지성의 문제라고. 그 답을 듣고 알쏭달쏭했다. 무슨 뜻이지?

 

어차피 우리는 다 언젠가 죽는다. 그건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웃으며 살 것인가, 굳은 얼굴로 무겁게 버티며 살 것인가. 동일한 상황 앞에서 누군가는 큰 고민 없이 자기의 부정적 감정을 배설하고, 누군가는 자기 감정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한다. 한없이 가벼워 보여도, 사실 누군가를 웃게 하기 위해선 그 사람을 향한 깊은 마음과 자기 체면을 내려놓는 행동이 필요하다. 꽤 큰 품이 드는 일이다. 나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며 살 수 있을까?

아기와 노는 어른들의 얼굴을 보며, 조슈에를 위해 행동했던 귀도를 보며, 결혼생활을 유지해 가는 남편을 보며, 나는 힌트를 얻는다. 니가 웃으면 나도 좋기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네가 웃기를 바라기에,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하는구나.

그렇다면 코미디언들은 엄청난 박애주의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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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1
    26 days 전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웃음을 준다"는 말이 참 아프기도, 인상깊기도 하네요. 저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에 잠깁니다. 이번 글도 너무 좋아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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