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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수필] 느리게, 더 느리게

2025.09.01 | 조회 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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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한국에서 가장 빠른 기차 KTX를 타고, 광주에서 서울까지는 두 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다. 인천에 살 때도 전철을 이용하거나 버스를 타면 두 시간 내외의 시간을 들여 서울에 갔다. 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할 때도 두 시간이었는데, KTX를 타면 광주에서 서울까지도 두 시간 내외면 이동할 수 있다니. 처음엔 시간을 아끼고 편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종이 한 장의 모서리와 모서리 끝을 맞붙여 접는 것처럼, 너무 빠르게 이동하는 일은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감을 지워버렸다.

 

재작년 광주 ACC에서 봤던 연극을 명동예술극장에서 또 한다는 소식에 오랜만의 서울행을 결정했다. 단지 이 연극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결정한 짧은 여행이었다. 이번에는 왕복 기차를 KTX가 아닌 ITX로 예매했다. 시간은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편도로 움직일 때, 4시간 10분 정도. 일반 승용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와 비슷한 시간이 든다.

광주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날, 나는 기차 안에서 간단한 간식을 먹기도 하고 미뤄둔 원고를 쓰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잠들기도 했다. 꽤 길고 피곤했지만, 그만큼 내 몸이 이동하는 거리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3일 동안 나는 명동, 합정, 망원, 소사, 부평, 모래내시장, 용산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이동하고,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고, 대화를 했다. 단 한 곳도 처음 가보는 동네는 없었다. 몇 번씩, 혹은 몇 년씩 방문하고 만나고 경험했던 공간. 하지만 단 한 곳도 그대로인 곳은 없었다. 무엇인가가 바뀌고, 없어지고, 새로 생겼다.

주안역에서 환승을 하기 위해 용산행 특급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이곳의 거주자가 아닌 방문객, 이방인의 시선으로 이 공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고 편했던 곳,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이 이제는 낯설다.

 

광주에 비해 서울은 참 많고, 빠르고, 편리하다. 그곳에서 살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벗어나 보니 확연한 차이를 느낀다. 그 흐름에서 빠져나와 광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한 나는, 수도권에 올라올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어쩌면 바뀐 건 그곳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수도권이 아닌 광주에서 살기로 결정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관계적으로, 업무적으로 여러 이유를 생각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큰 고민은 사실 없었다. 어떤 도시이든 결국 사람 사는 곳이고, 다 똑같다는 쉬운 소리를 하며 타지에 왔다. 막상 살아보니 예상하지 못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광주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리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이동속도가 빨라진다고 해도,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를 실제로 좁힐 수는 없다. 거리가 존재하는 만큼, 차이도 있고 불편함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이동을 위해서 수고가 필요하다.

나는 그 거리감을 무시하기보단 더 느껴보기 위해 좀 더 느리게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만큼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인지하고 느껴본다. 항상 빠르게 지내왔으니 가끔은 느리게, 더 느리게 가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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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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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의 프로필 이미지

    문헌

    0
    3 months 전

    명동, 합정, 망원, 소사, 부평, 모래내시장, 용산. 저에게 이 모든 장소 낯설게만 느껴져요. 환승을 위해 잠시 들리는 곳이거나, 아니면 아예 가 본 적도 없는 곳. 어쩌면 영원히 이방인으로만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장소들. 그렇게 생각하니 괜시리 서글픈 기분이 듭니다. 오늘 글도 너무 좋아요!!! 다음 글도 기대돼요!

    ㄴ 답글 (1)
  • 임연주의 프로필 이미지

    임연주

    0
    2 months 전

    너무 눈 깜박할 새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각자만의 페이스대로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무구님만의 페이스대로 뚜벅뚜벅 삶의 여정을 걸어가시길 응원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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