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온 뒤, 짐을 정리하면서 보물상자를 열었다. 보물상자는 말 그대로 내가 보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을 담아두는 상자다. 그 안에 진짜 귀금속은 단 하나도 없고, 어릴 적 쓰던 알 빠진 안경테나 수험생활 일정을 빼곡하게 적어둔 수첩, 여기저기서 받았던 롤링 페이퍼, 손때 묻은 작은 인형 등을 모아두었다.
그것을 왜 ‘보물’로 규정했었는지 생생하게 떠오르는 물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었다. 더 이상 내게 가치 없는 물건도 많았다. 그런 것은 따로 모아 잘 정리해서 버리기로 했다. 그것은 이제 내게 ‘보물’이 아닌 그저 잡동사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몸이 멀어지니 오히려 더 자주 생각이 나는지 요즘 엄마와 통화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번 통화에서는 엄마가 왜 이건 안 가져갔냐며 물었던 게 있었는데, 그건 중학생 때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받았던 자그마한 상패였다.
그 콩쿠르는 전국 단위였지만 참여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를 뺀 나머지 참가자들은 모두 초등학생이어서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대상을 받을 수 있는 기준 점수가 있었는데, 심사위원은 나에게 그 점수에서 딱 1점을 적게 주곤 대상 없는 최우수상을 수여했다.
이 점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그 후로 바이올린 공부를 멈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상이었으니 쉽게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공부를 하면서 더 이상 바이올린은 나의 삶에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 상패는 그냥 엄마 집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보물상자 안에 넣어두었던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보며 기억을 복기하는데 마치 바이올린 콩쿠르 상패처럼, 더 이상 내게 보물이 아닌 물건들을 발견했다. 나는 미련 없이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어딘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한때는 내게 보물이라고 여겨졌던 무엇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건 단지 물건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종종 생겨난다는 것을 떠올렸다.
한때는 가장 귀하고 보물 같았던 관계가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될 때가 찾아온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나는 많이 서글퍼진다. 물건이야 그저 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 사이 관계는 쉽게 정리하는 게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모아둔 편지를 정리할 때 이런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 그러나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바쁘게 일상을 살다 보면 반드시 그런 날이 찾아오고야 만다. 한때는 가까웠던 관계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는 날이.
보물상자를 정리했을 뿐인데 울적한 마음이 괜스레 쌓였던 그 밤에는 자기 전 누워서 남편에게 이런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새삼스레 내 옆에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앞으로 서로에게 늘 보물인 존재가 되기를 약속하며 결혼을 한 것이지, 하고 왼손 약지에 끼워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낳게 된다면, 또다시 내 삶에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 보물상자에 들어갈 품목들이 바뀌게 될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사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지각변동이 그동안의 삶 속에서도 몇 번이고 일어났을 텐데, 그저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이 변한다. 무엇이 보물인지도 변한다. 나도 변한다. 그리고 내 곁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 그 안에 존재하던 사람들도.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서 아찔한 느낌이 들다가도, 때로는 쉽게 그 변화에 익숙해진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이런 것인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인정하며 그 안에서 매일의 삶을 그저 충실히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물에서 잡동사니로 변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다시 상자의 뚜껑을 닫으며 생각했다. 1년 뒤에는, 5년 뒤에는, 10년 뒤에는 이 상자에 무엇을 담고 싶어질까? 그 나이의 나는 무엇이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나의 보물은 무엇이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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