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30. 마흔 일기 / 책

사랑하는 일

2023.11.17 | 조회 557 |
0
|
아주 사적인 마흔의 프로필 이미지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요 며칠 목이 간질간질 해서 매일 의식적으로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고 있어요. 집에서도 목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고요. 그랬더니 슬며시 시작되려던 목감기가 잠잠해졌답니다. 역시 물을 많이 마신다거나, 많이 걷는다거나,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이 가장 중요하구나 다시 한번 느꼈네요. 구독자님도 추워진 날씨 감기 조심하시길.  

언젠가 꼭 한 번 해야지 했던 주제가 바로 '책'이었는데 처음에는 에세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궁금하시다면 언젠가 '에세이'라는 주제로 풀어볼게요.) 이번 신간을 준비하며 느낀 점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오늘도 제 편지를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

 


 

30. 마흔 일기 / 책

사랑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지 말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마 그림과 글 모두 상관없는 사람으로 일하고 있어야 한다. 글과 그림을 빼고 남는 건 아마도 숫자일까.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구구단을 외운 내가? 일찌감치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하자던 학습지를 오래 했지만, 도무지 수학은 좋아지지도 실력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는 대학 시절 동아리 공금을 관리하면서 돈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늘어나는 기적을 행했으니, 이제는 아무도 나와 숫자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북페어에 나갈 때도 나는 핸드폰 계산기를 메인 화면에 띄워 놓는다. 18,000원과 15,000원짜리 책 두 권을 팔면서 5만 원권을 내는 손님에게 얼마를 거슬러 드려야 하는지 단박에 계산할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스멀스멀 웃으며 '제가 숫자에 약해서…' 라며 핸드폰을 꺼내 든다.

 

어릴 때 내 방에는 고흐와 피카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책상 앞에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었고 침대 옆은 피카소의 투우 장면이 그려진 스케치였다. 가족 모임이 있었던 어느 날 내 방에 들어온 이모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피카소의 스케치를 보고 한마디 했다.

“이건 나도 그리겠다. 너는 뭐 이런 걸 붙여놓고 있냐.”

책방이나 북페어에서도 종종 비슷한 말을 듣는다. 작고 얇은 책일수록 그런 평가를 듣기 쉽다. 휘리릭 책장을 넘겨보고는 ‘이런 건 나도 만들겠다. 이런 것도 책인가?’ 한 마디 남기고 누군가 애써 만든 책은 읽어 줄 독자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다.

피카소의 그림을 비웃던 이모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손님도 책을 만들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제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창작이란 얼핏 쉬워 보이기 마련이니까. 미술관 벽에 걸린 그림과 라인 밖에서 한발 물러서 지켜보는 관람객 사이에는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간격은 겨우 30센티 정도지만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사이는 까마득하게 멀다. 그 까마득함이 예술을 위대해 보이기도 우습게 보이기도 하는 거겠지.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치다. 손끝이 거뭇해지도록 고구마 순을 까본 적 있는 사람만이 나물 반찬 한 접시의 가치를 안다. 그걸 아는 사람만이 한 입 한 입 보약처럼 귀하게 먹는다. 다리가 저리도록 허리를 숙이고 반나절 쑥을 뜯어도 겨우 한 봉지가 채워지고, 쑥떡으로 만들면 한 줌의 덩어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내 입으로 들어가는 떡 한 개가 황송하다. 쉬이 맛을 평가하거나 남긴 걸 버릴 수 없게 된다. 맛이 있건 없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간을 만들었다. 매년 1권씩은 냈는데 이번 신간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터뷰집도 처음, 사진작가님을 섭외해서 함께 작업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몰랐으니 도전했지, 알았으면 못 했을 것이다. 어렵고 어려웠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출간 날짜를 언리밋 행사 때로 잡았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서울 아트북 페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독립출판 행사다) 이왕이면 이 책이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순간에 선보여야지 마음먹고 마감까지 쉴 새 없이 달렸다. 덕분에 이번 가을은 한숨 자고 나니 사라진 기분이다. 내 기억은 아직 여름의 끝인데 책이 나옴과 동시에 계절을 건너뛰어 추운 계절이 되었다. 그사이 뉴스레터도 쓰고 수업도 하고, 본캐인 엄마 노릇도 하면서 촘촘하게 살았는데 돌이켜 보니 찰나의 순간처럼 짧았다.

삼 일간의 페어가 끝나고 판매 내역을 정산해 보니 3일 동안 2,228,000원을 벌었다. 가져간 책을 다 팔고 왔으니, 책이 더 많았다면 더 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아쉬움도 있지만 10시부터 6시까지 밥도 먹으러 가지 않고 한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떠들었던 보상이자 기쁨으로 충분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책을 받으면 보내기로 했던 인쇄비 절반을 송금하고 나니 통장에 찍힌 금액은 25,000원. 페어 마지막 날 정리를 마치고 갔던 돼지갈빗집에서 고생한 나와, 엄마 없는 자리를 채우고 사느라 고생한 남편, 아이들과 함께 먹은 4인분의 식사비를 결제하기도 부족했다.

참 이상하지. 그런데 애써 고생한 돈이 사라진 것이 스쳐 가는 월급처럼 허무하지 않았다. 오히려 ‘와. 나 이번에도 해냈구나.’ 뿌듯했다. 처음으로 천만 원이 넘는 제작 비용이 들어간 책이다. (다른 출판사에서 보면 미쳤다고 할 거다) 돈도 없는 주제에 나와 함께 일한 디자이너와 사진 작가님에게 제대로 값을 치르고 싶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책에 하고 싶은 건 많았다. 아홉 가지 버전의 띠지 형식의 책 표지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만져본 적도 없는 금액의 돈을 이 책에 썼다. 그게 가능했던 건, 몇 년간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고, 나에게 글을 배웠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야금야금 쌓인 돈은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책이 되었다.

사실 제작비 250만 원이 부족해 남편에게 빌리긴 했다. 출판 경력 9년 차에 아직도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함이 쪽팔린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 생각을 밝은 곳으로 둔다. 때마침 남편이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이라 다행이었다. 그나마 책이 팔려서 비교적 빨리 백만 원이라도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빚을 갚으면 다시 부지런히 도토리를 모아 내년 혹은 후년에 만들 책을 준비할 수 있어 정말로 다행스러웠다.

 

며칠 전 ‘글쓰는 월요일’ 수업 중에 이번 신간을 다 팔면 얼마나 남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게, 얼마 남더라. 이미 사라진 돈이라 매번 나는 0에서 시작한다. 지금부터 생기는 수입은 책을 팔아 버는 돈이 아니라 새 책을 제작할 수 있는 돈이다. 그래서 거둬들여야 하는 마땅함보다 감사함이 더 크다. 이번 책에 썼던 글처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이상한 공식. 책이라는 물성의 이 종이 묶음은 아무리 대단한 작가와 오랜 시간 작업하고, 좋은 종이를 써서 숙련된 제작 업체에서 만든다고 해도 독자들이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적정 선의 가격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책에 들인 공과 가치가 꼭 가격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책을 쓰려는 사람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여전히 출판업계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책은 분명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서를 지닌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임이 틀림없다.

p.209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첨부 이미지

 


 

글 속에 ‘생각을 밝은 곳으로 둔다’는 표현은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인터뷰하며 들었던 이야기에요. 이 책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참 많은 성장을 했는데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고, 한동안 나를 지배했던 패배감이 사라졌어요.

구독자님이 혹시 저처럼,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행복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멀리 가닿아 나름의 의미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이라 해도 인생에 굴곡이 있어요. 만약에 운명이라는 게 있다 해도 마음의 선택 자체는 내가 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 선택을 밝은 데 두고 거 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장 은 표면적으로 뭔가가 잘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빈손인 것 같지만, 마음을 밝은 곳에 두고 나아가다 보면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오래된 미래’가 생각지도 못하 게 펼쳐지는 거지요.

p.86 『집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서

 

23. 11. 17 

희정.

 


 

📣 공지

아주 사적인 마흔 발행 방식을 조금 바꿉니다.

매월 1회 <마흔 일기>, 1회 <산책하는 말들>을 보낼게요. 산책하는 말들은 제가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한데, 걷고 읽고 쓰며 떠오르는 것들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제가 관심 있는 콘텐츠 리뷰가 될 수도 있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하게 이야기해 볼 예정이에요. 더 기다려지는 편지가 되길 바랍니다.  

:)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주 사적인 마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뉴스레터 광고 문의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