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39. 마흔 일기 / 엄마

마치 엄마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2024.07.18 | 조회 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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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39. 마흔 일기 / 엄마

마치 엄마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엄마 좋아하는 라테 한 잔과 빵 하나가 놓여있는 테이블 사진. 엄마는 몇 해 전부터 공공근로를 하고 있는데, 타들어갈 정도로 푹푹 찌는 날씨나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가끔 이렇게 땡땡이를 보고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걷기 힘든 날씨에는 어르신들 쉬어가라며 각자 자유시간을 갖도록 한다고.)  

-엄마 오늘 땡땡이 

-저번에 갔던 공원 카페네?

-어떻게 알았어? 우리 딸 똑똑이네.

우리 하나 똑똑이네. 아구 우리 똑똑이. 우리 똑똑이 그런 것도 알고 대단하네. 7살 내 딸아이가 구구단을 외울 때 내가 하는 말인데, 마흔 살이 되어도 여전히 엄마에게 똑똑이 소리를 듣고 있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마도 참, 내가 학창 시절 반에서 10등 이상으로 올라가 본 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릴 하다니.

나는 전혀 똑똑하지 않다. 그저 사진 속 빵 봉투에 쓰인 가게 이름으로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여전히 뭘 하든 똑똑한 딸이겠지. 내가 내 아이에게 그렇듯.

 

엄마에 대한 글을 쓰겠다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쓴 모든 책에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갔듯이 한 번은 쓰지 않을 수 없는 주제였다. 나는 엄마가 바라는 대로 자라고 싶었고, 그 방법 역시 엄마를 보며 배웠다. 그 사이에 긴 이야기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언젠간 엄마에 대한 글을 써야지 염두에 두고 있었으면서 쉽게 시작하지 못했던 것은 이런 복잡한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딸인지, 어떤 엄마인지, 나의 엄마는 또 어떤 엄마였는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단편 ‘관내분실’을 듣다(오디오 북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은 산후 우울증으로 아이에게 폭언을 쏟아내던 엄마가 죽고, 딸은 뱃속에 새 생명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뒤늦게 죽은 엄마의 흔적을 찾는 이야기였다. 소설이 나에게 무언가 깨우침을 줬다기보다 언제나 ‘엄마’의 입장에 이입되고 마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놀랐다. 그 이야기를 쓰자. 

마치 엄마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책, 드라마, 영화, 친구들의 이야기 속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틀림없이 엄마가 된다. 

이효리가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갔던 예능을 보며 나는 이효리의 엄마가 되어 내내 함께 했다. 우리 딸 예쁘네 머리를 땋아주고, 사진을 찍어 주고, 비 오는 날 전을 부쳐줬다.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엄마를 탓하고 울고 있는 딸을 안아줬다. 엄마의 입장이 된다고 해서 엄마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무조건적인 아이의 편에 선 엄마다. 그러니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받아온 것을 생각하면 ‘좋은 엄마’라는 것은 노력의 범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내가 그리던 미래의 모든 장면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옆에는 작은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그 아이와 함께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너무 호들갑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내 아이가 타고난 존재 자체의 완벽함에 대해서, 내가 품게 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에 대해서. 내가 받았던 사랑을 고스란히 전하고 내가 느꼈던 부당함은 잘 걸러내 돌보고 싶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과하지 않게. 

바로 어젯밤에도 딸아이의 팔을 만지는 감각이 생소하게 좋았다. 이 말랑하고 달콤한 아이가 내 옆에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고, 이 아이를 위해 써놓은 시가 있다고, 이 아이의 아이까지 사랑할 준비를 이미 끝마쳤다고 얘기하면 누군가는 날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의 기쁨과 슬픔> 속 '도움의 손길' 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엽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아이를 상상해 본 적는 사람에게는 그 비유가 꽤나 적절했나 보다. 여기 저기서 공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은 피아노를 갖길 간절히 소망하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못했다. 마침내 얻게 된 커다란 피아노를 위해 내 모든 공간을 내어주는 건 나같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설령 집이 사라지더라도 내 피아노만큼은 천막아래 지붕에 넣어두고 비바람을 피해 주리라 원하는 게 간절히 피아노를 갖고 싶던 사람의 당연한 마음이니까. 피아노의 등장으로 내 삶이 바뀐다고? 오,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던 거였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우리 엄마를 일컫어 외할머니의 전형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요리도 잘하시고, 자식들 먹으라고 반찬도 만들어 보내고, 뜨개질로 손주들 카디건을 떠주시고, 바느질로 가방을 만들어 주시지 않냐고. 어디 그것뿐일까 텃밭에서 손녀를 위해 딸기와 블루베리를 키우고 손주들이 원한다면 비 오는 날 산책이나, 밤늦게 놀이터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외할머니의 전형이기 전에 엄마는 현명한 엄마의 전형이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도 부족함이 없는 엄마였다. 엄마가 키운 공에 비해 나는 좀 부족한 딸이다. 그런 엄마를 가졌다면 지금보다는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어야 옳다. 그렇게 잘 키웠는데도 아웃풋으로는 고작 ‘지금의 나’라니. 나는 내 소박한 기준으로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엄마라는 인풋을 생각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 아무런 비약도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그렇다면 나는 엄마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가 라는 것이다. 내가 <엄마 친정엄마 외할머니>라는 책을 쓰고 난 후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친정엄마랑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부러워요.’ 내가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엄마를 도와 반찬가게 아르바이트생으로 지냈을 때도 그랬다. ‘엄마랑 어떻게 안 싸워요?’ 그럴 때면 매번 엄마와 딸 관계의 끈끈하고 치열한 애증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말았다.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엄마와 싸우는 딸들을 부러워한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애초에 엄마와 나는 대등하지 않다. 나는 엄마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엄마는 주고 또 주고도 부족한 사람이라서 나는 영원히 엄마를 원망할 거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그런 엄마의 딸로 태어난 건 복이라고 할 거다. 나 역시 완벽하게 동의한다는 점에서 나는 한번 더 외로워 진다. 

결혼하고 나서는 친정엄마에게 전화해 남편 욕을 하던 친구가 참 부러웠다. 나는 친정엄마 앞에서 잘 사는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내가 노력해서 살면 우리 딸 애쓴다 안쓰러워하실 테니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나도 아는 남편의 단점을 엄마 입에서 듣는 날이면 괴로워 잠을 설쳤다. 나의 괴로움은 온전히 내가 소화하고, 남편과의 불협화음은 엄마의 귀를 피해 광광 울렸다.

 

내가 엄마를 탓할 수 있는 거라고는 왜 그런 남편을 만나 평생 몰라도 되는 아픔을 겪었느냐는 것인데, 그것마저 엄마는 딸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아빠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지 못한다. 부모의 불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딸이길 원하시니 기꺼이 눈치채지 못한 해맑은 딸로 살고 있다.

엄마에게 받은 게 너무 많은 나는, 또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많은 엄마를 둔 딸은, 눈앞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 눈 딱 감고 나 혼자만 누려볼까 하는 것도 일단은 엄마 먼저, 엄마와 함께, 언젠가 엄마도 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대단한 효도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만 복잡하다. 매 순간 엄마에게 행복을 빚지고 있다.

 

그러니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이에게 주고 또 주어도 결핍을 느낄 수도, 너무 많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도, 내 배에서 나온 내 피 같은 자식이 서운하게 벽을 쌓는다. 엄마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낮고 견고한 벽을.

남들이 보기에 다정해 보이는 우리 모녀 사이에는 엄마의 헌신을 어떻게든 갚으려 넘치게 행복하고 싶은 딸과 그 딸이 엄마의 행복까지 짊어지고 싶지 않을 때마다 하나씩 쌓은 담을 모르는 엄마가 있다. 누가 그런것을 바랬냐며 그저 네가 행복하길 바란 것이라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내 불쌍하고 고마운 엄마.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헌신하면서도 내 행복을 움켜쥐어야 할까. 훗날 어른이 된 아이가 내 행복을 빚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당연할 거라 생각했던 ‘좋은 엄마’가 절대로 완성하지 못할 3천 피스짜리 퍼즐처럼 어려워진 지 오래되었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와 <엄마는 반짝반짝>을 같이 읽었던 때가 있어요. 둘 다 엄마에 대한 책인데 전혀 다른 형태와 톤으로 쓰였답니다. 놀라운 점은 그 책에 나오는 두 어머니는 저희 엄마와 전혀 달랐음에도 어느새 모든 페이지에 걸쳐 끄덕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건 엄마와 딸 사이의 흐르는 당사자만이 아는 묘한 사랑과 원망, 연대와 적의 때문이겠지요.

7월의 첫 뉴스레터를 조금 늦게 보냅니다. 두 번째 뉴스레터는 핀란스에서 써서 보낼게요. 

구독자 님 빗길 조심하세요.

 

24. 7. 18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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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뽕

    0
    over 1 year 전

    저는 제 딸아이를 키우면서 그 시절 내 엄마는,, 나를 사랑하긴 했을까란 의문을 한번씩 품는답니다,, <나쁜딸년..,,,ㅋ>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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