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막바지네, 비 온 뒤라 그런가 스산하기까지. 이런 날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를 들고 왔어. 몇십 년 전부터 이어진 클래식 짝꿍! 여름과 공포 영화.
먼저 알아두면 좋을 것, 나는 객관적 겁쟁이야. 돈 내고 영화관 가서 눈을 반쯤 가리고 보는 사람이자 점프 스케어 파트에선 감독 의도를 그대로 따르는 관객이지. "이러다 간 떨어지겠네"라는 말을 달고 살 정도였어.
하지만 나는 놀라는 행위가 지친다거나 불쾌하지 않아. 오히려 즐기는 편이랄까? 가끔은 놀란 나로 인해 주변 사람이 더 놀라서 미안할 때도 있지만, 평생 공포 영화로부터 오는 카타르시스는 놓지 못할 것 같아.
특히 영화관에서 즐기는 공포는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지거든. 다 함께 놀라 소리 지르고 팝콘을 떨어트리고 손잡이를 꽉 쥐는 모습이 영화적 체험을 배가시키는 것이지. 어느새 '겁쟁이도 공포 영화를 좋아할 수 있다.'라는 문장을 납득 시키기 위한 변명의 장이 된 것 같은데, 이해해주길 바라.
지금부턴 겁쟁이가 고른 BEST 공포/스릴러를 소개할 거야. 미니 심야 괴담회를 열어볼게. 학창 시절 폴더폰을 열어 무서운 이야기를 낭독했던 경험이 다수 있거든. 다들 두려워하던 NATE 버튼을 과감하게 누르던 학생이었지. 엄마 미안해.
- 참고 사항 -
ⓐ 앞서 말했듯 나는 점프 스케어를 좋아한다는 점 참고해줘 (웍!)
ⓑ 공포 영화라도 매 장면 납득 가능한 스토리가 필요해
ⓒ 유혈이 낭자하고 기괴한 크리처만 나열되는 공포엔 심장이 뛰지 않아.
내가 소개할 영화는 미저리, 최근엔 거의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이름이라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심리, 집착, 범죄, 고립 등의 키워드로 소개되는 영화지. 교수님이 수업 중 슬쩍 보여주신 클립에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이건 꼭 영화관에서 봐야겠다.'라고 다짐했어.
그렇게 끝없이 기다리던 중, CGV에서 어른을 위한 여름방학 기획전이 열렸고 드디어 미저리를 영화관에서 보게 되었어. 옛날엔 여름 하면 무조건 공포영화 한 편씩은 보러 갔는데, OTT 세상이 되고 나선 계절과 영화관의 상관관계가 무색해진 것 같아. 10년 넘게 여름마다 호러 영화를 보러 가던 친구들과 심야 괴담회 단관만 진행하고 있으니 말 다했지.
갑자기 궁금한데 네가 영화관에서 처음 본 공포 영화는 뭐니? 난 친구들과 조조 영화로 <화이트>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나. 극 중 은정이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니 괜히 섬뜩해진다. ♬ 점점 하얗게 하얗게 더 뜨거워 지는 나
미안 다시 미저리로 돌아갈게.
이 90년대 영화가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플롯은 굉장히 단순해, 차 사고로 길을 잃은 인기 작가 폴 그리고 그를 구조한 광팬 애니. 이 둘 사이는 덕질하는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낭만적일 수 있어. 하지만 미저리는 이런 감정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거세게 비틀어 버려. 아마 그래서 더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원래 관객이 주인공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서스펜스가 발생하거든. 미저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폴 보다 한 발짝 앞서 정보를 주는 바람에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들어. 위 이미지도 같은 선상에 있어. 애니는 그저 폴을 간호하는 차원에서 면도할 뿐인데, 관객들은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거지.
이렇게 치닫다가 결국 주인공과 정보량이 일치하는 순간!
함께 악몽을 경험하는 거야.
평범했던 일상에 금이 가고 낯선 환경에 놓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 상황. 상상하기도 싫지만 미저리를 보다 보면 어느새 내가 폴이 되는 VR 체험을 하게 돼. 온갖 도구를 사용해 '나'를 옭아매는 애니로부터 어떻게 탈출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되지.
이 과정에 있어서 점프 스케어도 자주 등장해. 감독이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탈출이라는 상황 때문에 관객 모두가 긴장하고 있거든. 자그마한 자극에도 깜짝 놀랄 수밖에. 삐걱거리는 마루 소리에도 헙-하고 숨을 참는 거야.
이렇듯 미저리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어. 영화관에서 관객들과 함께 놀랄 수 있으며, 모든 장면에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고, 심히 잔인한 장면이 없다는 점.
영화 속 인물들의 직업과 그들의 과거, 그리고 지나치며 뱉었던 말들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당위성을 만들어 준다는 게 흥미로웠어. 대부분의 스릴러는 맥거핀 장치를 설치해두어서 끝내 허무함을 느끼게 했거든. 영화 막바지에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짜릿함을 좋아한다면 미저리를 추천할게.
*맥거핀 : 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 (ex. 싸이코 속 돈다발)
다 적고 보니 스릴러 이야기만 했네. 난 사실 스릴러를 좋아하는 겁쟁인가 봐! 만약 내 삶이 스릴러 영화였다면, 화면 밖 관객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저 녀석 그렇게 놀라고 또 공포 영화 보러 간다며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르겠다.
추신. 내일 드디어 <놉>을 보러 가는데 얼마나 많이 놀라는지 세어볼게.
난 참고로 <겟아웃>을 다섯 번 보고 다섯 번 다 소리 질렀어.
From.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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