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첫 편지를 시작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이제야 운을 띄워. 담백하고 솔직한 편지를 쓰고 싶은데 쉽지는 않다. 차차 익숙해지면 좀 더 힘을 뺄 수 있겠지? 무엇보다 여기서만큼은 너도 나도 속이지 않도록 노력할게.
조금 뻔하게 옛날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해.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때 우리가 같이 미디어 업계를 꿈꿨던 게, 지금까지 많은 추억을 남겼구나 싶어. 그때는 방송국이 참 반짝여 보여서, 우리도 눈을 반짝였던 것 같아. 첫 편지를 쓰면서, 야자시간에 몰래 영화 보던 애들이 커서 이렇게 또 보고 쓰는 일을 벌였구나 싶어 웃음이 났어. 지금은 꿈에 먼지가 좀 쌓였지만, 우리가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게 기뻐. 점점 더 그런 순간들이 소중해지더라.
더 고리타분하게 계절 이야기도 해보려 해.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계절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 같아. 계절에 따라 에너지가 달라진달까. 여름은 생명력이 범람하는 계절이라는 것도 새삼스레 느껴. 무성한 초록, 쨍한 태양빛, 이글거리는 땅, 매미 소리, 쏟아지는 폭우, 불현듯 한 태풍. 에너지가 넘쳐서 좌충우돌 부딪히는 게 여름과 청춘이 어울리는 이유인 가 봐. 사실 여름엔 우중충하고 끈적이는 날도 많은데, 왜 화면 속 여름은 이렇게나 예뻐 보일까? 미디어 속에서 미화되는 것까지 청춘과 여름은 닮아 있는 듯해.
여름의 정점으로 접어드는 딱 이맘때쯤이 영화 ‘남색대문’의 제철 아닐까 싶어. 음,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17살 멍커로우, 장시하오, 위에전의 여름을 담은 대만 청춘 영화야. 솔직히 예쁠 수밖에 없는 조합이지.
하지만 영화는 초록빛이 아닌, 새카만 화면에 내레이션만 등장시키며 시작해. 눈을 감고 미래를 그려본다면 뭐가 보일까? 멍커로우와 린위에전은 체육시간 운동장 한편에 나란히 앉아 눈을 감고 있지만, 각자 상상의 선명도는 격차가 너무 커. 좋아하는 남자애와 결혼하고, 부잣집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술술 묘사하는 린위에전과 달리 멍커로우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하나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누군가 미래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 또한 아무것도 묘사하지 못할 것 같아. 요즘 어느 미래도 내 것 같지가 않아. 17살 때는 린위에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명확한 청사진을 지녔던 것 같은데. 이젠 내가 어떤 직업을 갖는다고 누가 스포일러를 해도 별 감흥이 없을 것만 같아. 인생은 결코 결정적인 한 장면으로는 묘사될 수 없는, 그저 매일매일 그려놓은 작은 스케치들의 모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 살면서 폭죽같은 사건들도 간간히 찾아오겠지만, 어른이 되어도 꿈을 이뤄도 사실 내가 겪는 건 매일의 일상이라는 게 조금 충격이었달까. 대신 은은한 행복을 지켜나가기 위해 정갈히 살아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고리타분함의 소중함을 점점 알아가. 운동 열심히 하고, 잘 먹고, 잘 자야 하는데 말이지! 17살 때의 눈으로 이런 말 하는 날 보면 조금 놀랄 것도 같다.
나는 그저 나이 먹는 게 사람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무언갈 좋아하는 마음은 그 대상이 뭐가 됐든 사람을 바꿔 놓는 것 같아. 멍커로우도 친구인 린위에전을 좋아하면서 그 여름의 모든 일을 겪게 되니까. 린위에전이 장시하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멍커로우가 장시하오를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흰 벽에 '난 여자다. 남자를 좋아한다'라는 문장을 계속해서 써 내려가지도 않았을 테고, 체육 선생님한테 자신과 키스하고 싶냐는 질문도, 엄마한테 아빠를 잃고 어떻게 견뎌냈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겠지. 멍커로우는 그렇게 부딪혀가며 자신을 발견하고 드러냈기에,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엔 한결 더 말간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싶어.
영화의 끝 무렵이자 여름의 끝 무렵, 멍커로우와 장시하오는 공원에 나란히 앉아서 이렇게 얘기해. "망했다. 여름이 다 끝나가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나도 그래. 그냥 쏘다니기만 했지. 한 게 없어". 이게 참 우리가 볼 때는 ‘아니, 뭘 한 게 없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나도 매번 저 생각하는 것 같아. 지금도 ‘망했다. 6월이 다 끝나가는 데 아무것도 한 게 없어’라는 불안감이 들거든. 그때 장시하오가 말하지. “하지만 뭔가 남은 게 있을 거야. 그 남은 게 우릴 어른으로 성장시키겠지?”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멍커로우, 장시하오, 린위에전을 보듯 한 발 떨어져 있을 때 분명 이 시간이 남긴 게 있다는 걸, 분명 좀 더 자라났다는 걸 목격할 수 있는 것 같아.
1년 후, 3년 후, 5년 후 우린 어떻게 돼 있을까? 역시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우리는 흔적을 쌓아 나가고 있을 테니 좀 더 부딪혀 봐야겠어. 1년 후, 3년 후, 5년 후 이 편지를 봤을 때 자라남을 발견하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 안녕!
FROM.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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