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 메일에서 제 두 전공 중 하나가 수학이라 소개 드렸었는데요, 다른 하나는 국어국문학입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맞춤법을 틀리는 것에 대해선 물론이고 신조어나 유행어에 까다롭게 굴 것 같다는 선입견이 많습니다.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유행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대개는 오히려 어떤 말이 새롭게 유행하는 걸 흥미롭게 바라보는 편입니다. 대학생 시절 하루는 전공 필수 과목에서 교수님이 들어 오시자마자 "요즘 '성괴'라는 말이 있나? 무슨 뜻이지?"라고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물으셔서 웃음이 나왔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한국어는 과거에 박제되어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고 있는, 살아있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새로운 말이 생겨나고, 없던 뜻이 붙고, 있던 말이 변합니다. 막으려 든다고 쉽게 막히지도 않고, 막을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은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표준어가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 비교적 역사가 길지 않은 표현들을 몇 가지 준비해 보았습니다.
'신기하다'와 '쌈박하다(아닌 것 같지만 표준어입니다)'가 합쳐진 듯한 느낌을 주는 단어 '신박하다'는 게임 커뮤니티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는 '성기사'라는 직업이 있는데, 이 직업을 혐오하는 유저들이 '기사'를 벌레에 빗대어 '바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바퀴'는 시간이 지나며 '박휘'로 변하고, 기사에 대한 혐오는 맥락과 상관 없이 '기사'라는 말을 모조리 '박휘'로 대체하는 장난으로 번집니다. 성기사 중 '신성' 특성을 쓰는 성기사, 즉 '신성 성기사'는 '신기'라고 줄여 부르는데 이 또한 '신성 박휘'라는 의미의 '신박'으로 대체됩니다. 즉 '신박하다'는 처음에 '신기하다'를 다르게 쓰는 정도의 장난이었고, 이것이 '쌈박하다'와 같은 묘한 어감을 주면서 지금은 '신기하다'와 살짝 다른 뉘앙스를 주는 단어가 되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완전'을 부사로 사용하는 것은 가수 전진 씨가 유행시킨 것입니다. 2000년대에는 연예인들이 미팅을 하는 것 같은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유행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리얼로망스 연애편지'라는 프로그램에서 다른 출연자들이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등의 표현으로 어필하는 것과 겹치지 않기 위해 전진 씨가 만들어낸 표현이 "완전 사랑합니다"였습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이 때는 '완전'이 부사로 쓰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무척 어색하고 그래서 웃긴 표현이었습니다. 저도 이 시기 명절에 멀리 사는 친척들을 만났는데 "완전 잘해" 같은 표현을 쓰는 걸 듣고 그런 말이 어딨느냐며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 표현이 크게 유행해서 제가 사는 지역에서도 "완전 잘해"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과거'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흑역사'는 원래 '∀ 건담'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제가 그 애니메이션을 보진 못해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작중에서 인류가 전쟁을 지속했던, 이제는 터부시되는 시기의 역사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한자어로 직관적으로 뜻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쉽게 유행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도 없다', '하나도 모르겠다' 등을 '1도 없다', '1도 모르겠다'라고 쓰거나 심지어 읽기도 하는 것은 표준어 규정 상 바른 표현은 아닙니다.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가수 헨리 씨가 '진짜 사나이' 방송에서 잘못 썼던 것이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1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완전 사랑합니다'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표현 자체가 웃겼지만, 이제는 하도 많이 쓰여서 꽤 진지한 어조의 노래인 '1도 없어'에 쓰여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하나'를 수사로 쓰는 경우에는 '하나'로 써도 '1'로 써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하나도 모르겠습니다'의 경우, 이 '하나'는 수사가 아니라 '(주로 ‘하나도’ 꼴로 쓰여 뒤에 오는 ‘없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호응하여) ‘전혀’, ‘조금도’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란 뜻의 명사로 쓰이기 때문에 '1'이라 쓸 수 없습니다.
'대인배'라는 단어는 김성모 씨의 만화 '럭키짱'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성모 씨는 '소인'의 반댓말은 '대인'이니 '소인배'의 반댓말은 '대인배'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하지만 '대인배'는 원래 없었던 말입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배'는 '무뢰배', '간신배', '불량배' 등 부정적인 단어들에 많이 사용됩니다. 유교 경전 등에서는 주로 '군자'가 '소인', '소인배'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외에도 '괴랄하다', '작업 걸다', '뻘쭘하다', '쩔다' 등 다양한 유행어들이 표준어 급으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여러분도 알고 계신 자연스러운 유행어가 있으시다면 댓글에 남겨 주세요. '성괴'의 의미를 물으셨던 교수님처럼 저도 재밌는 말들을 수집하고 싶습니다.
댓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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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
재밌었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고 유행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기원과 유행의 과정이나 유행 시작점을 궁금하게 하는 단어들이 꽤 있습니다 : 귀염뽀짝하다, 아스트랄하다, 심쿵, 아가리어터 '존나'가 어느 말에서 왔는가를 듣고 놀란 바 있으나 지금의 형태를 갖춘 과정은 모르며 궁금하기도 합니다.
페퍼노트
'존나'는 최근에 생겨난 유행어는 아닌 듯 하고, 아마도 궁금하신 부분은 '어원대로라면 '좆나'라고 쓰는 쪽이 자연스러울 텐데 언제부터 '존나'라고 쓰게 됐을까' 하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인물인 김삿갓의 시 중에 '방중개존물 房中皆尊物'이라는 행이 등장하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도 '좆물'을 '존물'이라 쓴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이미 '[좆물→졷물→존물]'과 같은 음운 변동이 있었던 듯 합니다. '좆나'도 똑같은 음운 변동으로 '존나'라고 발음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구어체의 말을 글로 적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표현이 직접적인 '좆나'보다는 '존나'라고 표기하는 경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조낸' 같은 단어들도 많이 사용되던 기억이 나네요.
Mia
상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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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jungzun
하이슨~👋 바이슨~👋
페퍼노트
저는 처음 들어 본 표현입니다 😂 혹시 유래를 알고 계신가요?
kim jungzun
Hi, Bye + 다이슨의 신조어라고 하더라구요! 예전에 하이루~ 바이루~ 와 같은 결이라 생각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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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재밌었습니다 소개해주신 말들이 이젠 익숙하게 들리네요 ㅎㅎ 처음에 어색했을 때가 있었다니 신박할 따름입니다 어제 혐오가 담긴 커뮤니티 신조어를 모르고 쓰고 크게 사과하는 유튜버가 떠오르네요 남들이 자주 쓰는 단어라도 어원을 찾아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완전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퍼노트
후원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뉴진스 민지 님이 신조어를 쓰는 멤버에게 "너 그거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고 쓰냐"라고 혼냈다는 걸 보았는데 좋은 자세 같습니다. 요즘은 너무 안 좋은 유래의 유행어가 많아서 항상 유래를 먼저 찾아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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