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물체에 반사된 빛을 통해 물체의 색을 느낍니다. 어떤 물체가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기만 하고 반사하지 않으면 우리 눈엔 검게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물체가 빛을 100% 흡수만 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일부 반사되는 빛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검은 물체들 사이에서도 어느게 더 검은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영국 기업 Surrey NanoSystems가 '반타블랙(Vantablack)'이라는 물질을 개발합니다. 머리카락 굵기의 1만 분의 1 정도 되는 탄소나노튜브들을 촘촘하게 세워, 빛이 튜브 사이에서 반사되느라 물질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되는 원리입니다. 이 물질은 빛의 흡수율이 자그마치 99.965%에 이르러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빛의 흡수율만 들어서는 이 물질이 얼마나 검은지 감이 잘 오지 않으실 것 같아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반타블랙을 그림 그릴 때 쓸 수가 없습니다. 인도/영국의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가 Surrey Nanosystems로부터 반타블랙을 예술 분야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독점권을 샀기 때문입니다. 카푸어는 본인의 예술 작품에만 반타블랙을 쓸 수 있게, 다른 사람의 반타블랙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튜어트 셈플이라는 예술가가 앞장섰습니다. 그는 카푸어와 반대로 그가 직접 만든 물감들을 공개적으로 판매합니다. 다만 지구 상에서 단 한 사람, 아니쉬 카푸어에게만큼은 물감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 차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쿠키 사용 동의 팝업에서부터 'I am not Anish Kapoor and I am happy with Cookies'라는 버튼이 눈에 띕니다.
그의 홈페이지에선 '세상에서 가장 노란 노란색', '세상에서 가장 분홍색인 분홍색', '세상에서 가장 녹색인 녹색' 등의 물감을 팔고 있습니다(제품명일 뿐입니다. 어떤 색이 가장 분홍색인가에 대해서는 기준부터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품을 장바구니에 넣기 전 안내 문구가 있는데, 구매자는 아니쉬 카푸어가 아니고 아니쉬 카푸어와 제휴 관계가 아니며 아니쉬 카푸어 또는 그의 직원을 대신하여 이 품목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받는 내용입니다.
셈플은 반타블랙을 대체할 검은 물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끝에 블랙2.0이라는 물감을 개발해 냈습니다. 하지만 블랙2.0은 가시광선 흡수율이 97.5% 밖에 되지 않아 반타블랙의 흡수율에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수 년 간의 노력 이후 지난 달, 그는 블랙4.0을 발표했는데 흡수율 99.95%를 달성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하고 만다'의 생산적인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됐든 누구나 살 수 있고 아니쉬 카푸어만큼은 살 수 없다는 정책은 늘 그대로입니다.
참고로 반타블랙이 가지고 있던 가장 검은 검은색 타이틀은 이미 2019년에 빼앗겼습니다. MIT 연구진이 99.995%의 흡수율을 자랑하는 물질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연구진도 카푸어의 독점에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 모든 예술가가 이 물질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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