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활에서 익숙하게 보는 유리가 사실은 액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일상적인 환경에서 유리는 당연히 고체 아닌가 싶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입자들이 규칙적인 격자의 형태로 단단히 결합된 것을 고체, 입자들이 불규칙적인 형태를 띠고 단단히 결합되지 않은 것을 액체라 정의한다면, 유리는 그 중간의 모호한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리의 입자는 단단히 결합되어 있지만, 구조가 불규칙적인 그물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리가 액체라는 주장이 있었고 액체도 고체도 아닌 별도의 분류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입자들이 결정의 형태를 띠는 것을 고체의 조건으로 삼지 않고, 유리를 '비결정성(비정질) 고체'라고 하여 고체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유리가 액체라는 주장에 근거로 종종 인용되는 것이 중세에 지은 유럽 성당의 유리창들은 아래쪽이 위쪽보다 두껍다는 점입니다. 유리는 엄청나게 끈적할 뿐 액체인지라,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난 유리창들은 아래쪽이 두터워졌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틀렸습니다. 정말로 흘러 내려서 아래쪽이 두꺼워진 것이라면, 창틀로도 유리가 흘러 넘쳤어야 할 텐데 그런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 그보다 더 오래된 고대 로마의 유리병 등에서도 녹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평평했던 유리가 녹아서 아래가 두꺼워진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기술로는 유리 창을 평평하게 만들기 어려웠고, 안정감을 위해 두꺼운 쪽을 아래로 끼웠을 것이라는 게 좀 더 이치에 맞는 설명입니다. 계산에 따르면 유리가 1 나노미터를 녹아 흐르기 위해선 10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로 지독하게 끈끈해서 고체처럼 보이는 액체가 있습니다. '피치' 또는 '타르'라고 부르는 이 물질은 점도가 물보다 2300억 배나 높습니다. 실온에서 거의 고체로 보이고 심지어 충격을 가하면 깨지기까지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피치를 고체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호주 퀸즐랜드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 토마스 파넬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학자답게 피치가 액체임을 실험으로 보이고자 했습니다.
실험 내용은 간단합니다. 깔때기에 피치를 붓고 그 밑에 비커를 두어서, 피치가 흘러 비커에 한 방울 똑 떨어지는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실험을 1927년에 계획했는데, 피치를 가열하여 깔때기에 붓고, 그것을 안정시키는 데에만 3년이 걸려 1930년에야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막아두었던 깔때기의 아랫부분을 개봉하는 것으로 실험은 시작되었습니다.
파넬의 예상처럼 깔때기의 피치는 조금씩 흘러 아래쪽에 물방울이 맺히는 듯 했습니다. 다만 정말 조금씩이었습니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떨어질 생각이 없던 피치 방울은 무려 8년의 세월이 지난 1938년에 처음으로 비커에 똑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피치 방울이 떨어지던 그날 파넬은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비커에 떨어진 이 방울이 정말 깔때기에서 떨어진 것이 맞는지 지켜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실험을 종료할 순 없었습니다. 1947년에 두번째 피치 방울이 떨어졌을 때에도 파넬은 그 모습을 지켜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피치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1948년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유지는 존 메인스톤이 넘겨 받았고, 1954, 1962, 1970, 1979, 1988년에 한 방울씩 떨어졌지만 그는 이 다섯 번을 모두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1988년에는 실험 장치가 브리즈번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전시되어 있었는데도(브리즈번 세계박람회의 방문객은 1500만 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치 방울이 떨어지는 걸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메인스톤은 차 한 잔 하려고 단 5분 자리를 비웠었다고 합니다.
여덟번째 피치 방울이 떨어질 2000년에는 기술이 발전하여 존 메인스톤은 직접 지켜볼 필요 없이 웹캠을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필 그 날 폭풍이 닥쳐 기술적인 문제가 일어나면서 피치 방울이 떨어지는 그 순간을 녹화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존 메인스톤도 피치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1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3대째 유지를 이어 받은 앤드류 화이트가 2014년 아홉번째 피치 방울을 지켜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피치 방울이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기존에 떨어진 여덟 방울의 피치에 닿고 말았습니다. 이대로 아홉번째 방울이 여덟 방울과 합쳐진다면, 이후 방울이 형성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앤드류 화이트는 비커를 교체하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커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아홉번째 피치 방울이 뜯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뜯어져 나간 것은 피치가 액체임을 증명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앤드류 화이트는 열번째 피치 방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실험은 94년이 지나도록 현재 진행 중입니다.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실험으로 기네스 북에도 올랐습니다. 하지만 열번째 피치 방울만큼은 기대해 볼 만합니다. thetenthwatch.com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이 열번째 피치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생중계 중이니, 여러분도 이 역사적인 실험이 성공으로 끝나는 모습을 마침내 지켜 보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알아보기
나무위키, 유리
The American Ceramic Society, Viscous flow of medieval cathedral glass
Is glass liquid or solid?
Scientific American, Fact or Fiction?: Glass Is a (Supercooled) Liquid
나무위키, 피치 낙하 실험
Wikipedia, Pitch drop experiment
The University of Queensland, Pitch Drop experiment
은근한 잡다한 지식, 심지어 지금도 실험 진행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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