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작품들 속에서 노인들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무공은 시간을 들일 수록 깊어지는 데다 신체의 노화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오히려 늙을 수록 더 강하게 그려져서 노인 캐릭터가 "젊은이가 제법 하는군" 같은 대사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실에서도 무공을 연마한 것처럼 노화를 무시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계속해서 강해지는 동물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바닷가재입니다.
염색체 말단에는 '텔로미어'라는 것이 있는데, 세포의 복제 과정에서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부분입니다. 텔로미어가 다 닳아 없어지면 세포는 더 이상 복제를 할 수 없습니다. 세포 복제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동물은 결국 늙고 죽게 됩니다. 즉 텔로미어는 노화와 깊은 관련이 있고, 이 때문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텔로머레이스'라고 하는 특수한 효소가 있습니다. 이 효소는 텔로미어를 복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암세포가 죽지 않고 계속해서 복제하는 것도 바로 이 텔로머레이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닷가재는 이 텔로머레이스가 활성화한 독특한 동물입니다. 텔로머레이스 덕분에 바닷가재는 텔로미어가 닳지 않습니다. 즉 이론적으로 바닷가재는 노화에 의해 죽지 않습니다. 노화는커녕 멈추지 않는 성장으로 계속해서 강해지고, 가임능력도 좋아지고, 껍데기도 단단해집니다.
물론 실제로 바닷가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닷가재는 갑각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탈피를 해야 합니다. 바닷가재는 성장이 멈추지 않기 때문에 탈피도 계속 됩니다. 성장함에 따라 껍데기도 계속해서 단단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껍데기가 너무 단단해서 탈피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결국 탈피 과정에서 지쳐 버리거나, 다른 생명체에게 공격 당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찌어찌 탈피를 해냈다고 해도, 탈피 직후에는 외부의 공격에 치명적인 상태가 됩니다. 그 과정을 이겨냈어도 결국 다음 탈피에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예 탈피를 포기할 경우에는 껍데기가 닳아서 세균 등에 취약해져 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생명체들을 보면 꼭 얼기설기 짜인 낡은 프로그램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죽지 못하는 사정 때문에 우회 방법으로 죽게 되는 바닷가재를 보면서 저는 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협 작품 속 노인들처럼, 나이들수록 강해지는 바닷가재는 결국 자신의 강해진 몸을 이겨내지 못해 죽는 셈입니다.
같이 볼 링크
유튜브 TV생물도감 '영원히 살 수 있는 바닷가재가 영원히 살 수 없는 이유!'
나무위키 '바닷가재' 문서 #3.2 불로장생
Smithsonian magazine 'Don't Listen to the Buzz: Lobsters Aren't Actually Immor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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