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수, 제왕절개, 형이상학

어쩌면 이 단어들의 진짜 뜻은

2026.02.14 | 조회 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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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수, 제왕절개, 형이상학.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이 뭘까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 세 단어는 모두 번역 과정에서 원래 뜻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정설이고 어떤 것은 가설입니다만, 하나하나 재밌는 이야기들입니다.

유리수(有理數)는 '이치가 있는 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ational number인데요, rational이 '합리적인'이라는 뜻이니까 번역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rational의 어원인 라틴어 ratio에는 '이성, 이치'와 '셈, 계산' 두 가지 뜻이 공존했습니다. 수학에서 유리수란 두 정수의 비(比)로 나타낼 수 있는 수입니다. 그러니까 수학적 맥락에서 rational number는 '비율(ratio)로 표현할 수 있는 수'에 더 가까운 셈이죠. 이 논리대로라면 '유비수(有比數)'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역'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원래 라틴어 ratio 자체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rational number'라는 표현(1560년대)이 ratio의 현대적 의미 '비율'(1650년대)보다 먼저 수학 용어로 쓰이기도 했고요. 메이지 시대에 일본 학자들이 사전적 의미에 따라 有理數라고 옮겼고 이것이 한국에도 그대로 들어왔는데, 원어 자체가 애매했으니 단순한 오역이라기보다는 원래 단어의 한쪽 면을 택한 것에 가깝습니다.

제왕절개(帝王切開, Caesarean section)에서 '제왕'이 들어간 이유를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때문이라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확실히 허구입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는 출산 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았는데, 당시 의술 수준에서 제왕절개 후 산모가 생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caesarean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걸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설이 경합하고 있고,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 라틴어 caedere(자르다)에서 파생된 caesones(절개로 태어난 아이들)에서 왔다는 설, 고대 로마 법률 Lex Caesarea에서 유래했다는 설, 카이사르 가문의 어떤 조상이 절개 출생으로 Caesar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어느 가설이 맞든, '제왕'이라는 번역이 들어온 경로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라틴어 sectio caesarea가 독일어 Kaiserschnitt(Kaiser=황제, Schnitt=절개)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일본어를 거쳐 한국어 '제왕절개'가 된 것입니다.

세 단어 중 가장 명확한 사례는 형이상학(形而上學)입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정설에 가깝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작에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이 분야를 '제1철학', '지혜', '신학' 등으로 불렀습니다. '메타피직스(Metaphysics)'라는 이름은 기원전 1세기,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을 정리하면서 자연학(φυσικά, Physics) 뒤에 배치된 책들에 "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ά", 즉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붙이며 생겨났습니다. 원래는 편집 순서, 혹은 자연학을 먼저 공부한 뒤에 읽으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μετὰ(meta)"가 "뒤에(after)"라는 뜻 외에 "넘어서(beyond, trans)"라는 뜻도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을 초월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로 재해석되었습니다. 도서관 서가 정리 라벨이 심오한 철학 용어가 된 셈인데, 이 우연의 일치가 너무 절묘해서 칸트조차도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의심을 표했습니다.

1881년 메이지 시대에 이노우에 테츠지로는 이 단어를 주역의 '形而上者謂之道(형체를 초월한 것을 도라 한다)'에서 가져와 '형이상학'이라 옮겼습니다. 이게 한국어에도 그대로 들어오면서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들'이라는 의미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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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lluza

    0
    about 15 hours 전

    헐. 형이상학은 사실 그 뜻을 알아도 여전히 와닿지 않는 단어였는데 이 글을 보고 파노라마처럼 제 인생의 형이상학이 눈앞에 순간적으로 펼쳐진 느낌이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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