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네 거 아니야?

고추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왔는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는가

2025.07.06 | 조회 1.03K |
0
|

남의 나라 문화 유산을 놓고 자기네 거라고 우기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유래가 모호할 경우에는 서로 자기네 거라고 주장하며 대립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서로 남의 거라고 미루는 경우도 있을까요?

그 대상이 부정적인 것일 경우에는 서로 미루는 예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매독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다녀온 이후 유럽에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유럽 최초의 매독 발병 기록은 프랑스가 나폴리를 침략했을 때 나폴리에서 발생한 매독입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음 보는 병이 퍼지니 나폴리에선 이 병을 프랑스 병이라 불렀고 프랑스에선 이 병을 나폴리 병이라 불렀습니다. 후에 성병인 게 밝혀지고 나서는 나라들마다 서로 문란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나라의 이름을 따서 불렀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 각지에서는 매독을 스페인 병, 포르투갈 병, 독일 병, 폴란드 병 등 서로의 이름을 따 다양하게 불렀습니다.

레딧에서 발견한 각국의 매독 명칭을 표시한 이미지입니다. 이미지에 나온 모든 경우들을 팩트 체크해 보지는 못했지만, 상당 부분 실제로 그렇게 부른 경우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레딧에서 발견한 각국의 매독 명칭을 표시한 이미지입니다. 이미지에 나온 모든 경우들을 팩트 체크해 보지는 못했지만, 상당 부분 실제로 그렇게 부른 경우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이름입니다. COVID-19를 부를 때에는 발병 의심 지역의 이름이 들어간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기로 했는데 비해,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이 발원지도 아니고 스페인 사람들이 특별히 많이 걸린 병도 아닌데도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전국들은 언론 검열로 인플루엔자 감염 상황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은 감염 상황을 자유롭게 보도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스페인의 보도만을 참고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마치 스페인에서만 창궐하는 것처럼 보여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영어에 대마초를 뜻하는 단어로 'cannabi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marijuana'가 더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대마초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따로 있었음에도 1930년대부터 미국은 마리화나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마약이라는 나쁜 것이 외국에서 들어왔다는 이미지를 내기 위해서 멕시코에서 쓰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푸시한 것입니다.

한편 위의 예시들처럼 대상이 부정적인 게 아닌데도 서로를 기원으로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더 놀랍게도, 이런 쪽으로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한국과 일본 간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 고추가 언제 들어왔다고 알고 계신가요? 많은 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된 고추가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을 통해 전래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고추가 한국을 통해 전래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17세기 조선의 '지봉유설'에는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됐다고 나옵니다. 1709년 일본의 '대화본초'는 고추에 대해 '옛날에 일본에는 없었고 히데요시 공이 조선을 정벌할 때 그 나라에서 종자를 가지고 들어왔다'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두 나라 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니 전에는 못 보던 채소가 각자의 나라에서 자라고 있어서 서로 상대를 통해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구두'라는 단어입니다. 국어사전에서 '구두'를 찾아보면, 일본어 '구츠'가 어원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일본의 일부 민간 어원 사전에서는 반대로 일본어 '구츠'가 한국어 '구두'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서로 우리가 원조다, 우리가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 게 최고다, 심지어는 네 것도 내 것이다 주장하는 경우들만 봐오다가 오히려 '그거 너희가 준 줄 알았는데?' 하는 것들도 있다니 참 재밌는 케이스들이었습니다. 혹시 이와 같은 경우를 더 알고 계신 게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 알아보기

페퍼노트, 호박과는 무관했던 울릉도 호박엿, 청양과는 무관했던 청양고추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페퍼노트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무단횡단은 불법이어야 할 이유가 없고, 플라스틱은 일회용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케팅으로 바뀌어버린 사회의 기준. 저는 요즘 1899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189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자동차는 보이질 않습니다. 길에는 걷는 사람

2024.10.19·조회 2.18K·댓글 4

38분 만에 끝난 전쟁

영국-잔지바르 전쟁에 대해 알아 봅니다. 한국은 여전히 전쟁 중인 국가입니다. 1953년 휴전을 하였으나 종전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7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역사에는 고작 38분 만에 끝

2024.11.02·조회 3.25K·댓글 2

일본 빼고 다 써서 일본을 물리친 일본의 발명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대활약을 펼친 야기-우다 안테나에 대해 알아봅니다. 페퍼노트를 쓰며 가장 안타까웠던 소재 중 하나가 '연은분리법'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이 글은 은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술을 조선에서 발견했지만, 정작 조선은 써먹지

2024.07.13·조회 2.12K

당신은 이걸 처음 봤지만, 이것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부바/키키 효과에 대해 알아봅니다.. 언어 관련 전공을 하신 분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이름으로 소쉬르가 있습니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우리가 단어로 어떤 대

2024.03.08·조회 3.45K·댓글 4

아 맞다, 전쟁 중이었지

영국과 네덜란드, 전쟁 당사자들조차 전쟁 중인 걸 까먹어버린 335년 전쟁. 30여 분 만에 끝나버린 전쟁에 대해 메일을 보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국-잔지바르 전쟁은 그렇게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긴 전쟁으로 눈을 돌려

2025.01.11·조회 1.47K

어쩌다 보니 바뀌어 버린 색깔들

원래 회색이었던 헐크, 실수로 탄생한 이탈리아 국기, 건반 색이 반대였던 피아노. 자몽이 붉은 빛을 띠게 된 것은 감마선 때문임을 설명드렸던 적 있습니다. 이 때 자몽을 헐크에 빗댔었습니다. 그런데 헐크의 색깔도 원래는 녹색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마블

2024.07.06·조회 2.3K·댓글 4
© 2026 페퍼노트

당신의 삶에 양념 같은 지식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할 때 '그런 것'들을 전해 드립니다.

뉴스레터 문의pppr.note@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