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양', '산양', '염소'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 단어인지 섞일 예정이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게 용어부터 정하겠습니다.
- 우리가 흔히 '양'이라 부르는, 잠잘 때 세는 동물(잠잘 때 양을 세는 문화는 Sheep의 발음이 쌔근거리는 숨소리 같기도 하고 Sleep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여 유래한 것으로 한국어 사용자는 양을 세도 잠이 잘 안 옵니다)을 A라 하겠습니다.
- 우리가 흔히 '염소'라 부르는, 종이도 먹는 걸로 유명한 동물을 B라 하겠습니다.
- 우리가 흔히 '산양'이라 부르는, A와 B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동물을 C라 하겠습니다.
A는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개 다음으로 가축화에 성공한 뿌리깊은 동물입니다만 동아시아에는 B보다 나중에 들어 왔습니다. '羊(양)'이라는 한자는 A의 뿔과 꼬리를 묘사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羊이라는 한자가 만들어질 시기를 고려하면 B를 묘사한 글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십이지가 생겨나던 시대도 마찬가지로, '양띠'의 '양'은 A보다 B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이후 A도 동아시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 되어, 사람들은 A와 B를 구분없이 '양'이라 불렀습니다. 구분이 필요하다면 A를 '면양', B를 '산양'이라 불렀는데, 점차 A가 '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독차지하여 A='면양'='양' 관계가 되었습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선 여전히 B를 '산양'이라고 표기합니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B를 '염소'라 부르고, '산양'이라는 이름은 전혀 다른 제3의 동물, C에게 붙었습니다. 만약 중국인, 일본인이 산양 고기를 먹는다고 하면 '별 걸 다 잡아 먹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긴 염소 고기는 우리나라에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 A: '양' 또는 '면양'.
- B: 옛날엔 '양' 또는 '산양'이라 불렸지만 점차 A에게 '양'을 뺏김. 중국과 일본에선 '산양'. 한국에선 '염소'.
- C: 한국에서만 '산양'
그렇다면 과학적으로는 세 동물이 얼마나 가까울까요? A는 소과 영양아과 양족 양속에 속합니다. B는 소과 영양아과 양족 염소속에 속합니다. C는 소과 영양아과 양족 산양속에 속합니다. 즉 세 동물은 속 단위에서 갈립니다. A와 B는 고작 400만 년 전에 갈라졌습니다.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시기보다도 최근입니다. A가 가축이 된 것은 기원전 8,000~9,000 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가축화되기 전의 A는 B와 더욱 닮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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