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수 역설'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모든 자연수는 흥미롭다는 결론이 나오는 수학적 농담입니다. 만약 흥미롭지 않은 자연수들이 있다면, 그런 수들 중에서 가장 작은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지 않은 자연수 중에서 가장 작은 수'라는 것은 흥미로운 성질입니다. 따라서 그 수도 흥미로운 수가 되어버립니다. 이는 모순이므로 흥미롭지 않은 자연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흥미로운 수 역설에 대해 먼저 설명드린 이유는 다음 질문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구독자 님이 알고 계신 자연수 중에 가장 큰 수가 무엇인가요? 어떤 수를 말하시든 그 수에 1을 더하면 그 수보다 큰 수가 나오므로 싱거운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질문을 '흥미로운 수 중에 가장 큰 수'로 바꿔 보겠습니다. 이러면 흥미로운 수 역설에 빠집니다만,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흥미로움'이란 단어에 대한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죠. 뭔가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있거나 별칭 같은 게 있는 수 중에 어떤 수가 가장 큰가요?
'구글'의 이름 유래가 된 '구골'이라는 수를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구골은 10의 100제곱, 즉 1 다음에 0이 100개 붙은 수입니다. 이 수는 한 수학자가 9살 난 조카에게 엄청 큰 수를 만들어보라고 하자 조카가 생각해냈다는 수입니다. 구글의 창립자들은 원래 인터넷 상의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다루겠다는 뜻에서 구골이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는데, 투자자가 수표에 이름을 잘못 쓴 바람에 구글로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골만 해도 좀 억지스럽습니다. 딱히 쓸모는 없고 그냥 큰 수를 만들고자 만들어진 수니까요. 그러나 오늘 제가 소개할 수는 억지로 큰 수를 만들고자 만든 수가 아니라 어떤 문제의 답을 찾다보니 나온 수입니다. 그러면서도 구골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데요, 바로 '그레이엄수'입니다.
그레이엄수가 등장하게 된 문제는 이렇습니다. 2차원 도형인 정사각형을 생각해 봅시다. 꼭지점이 4개 있습니다. 이 점을 모두 이으면 총 6개의 선이 나옵니다. 이 선들을 두 개의 색으로 칠해 볼 건데요, 단 이 6개의 선이 모두 같은 색이 되지는 않게 칠해야 합니다.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번엔 3차원 도형인 정육면체를 생각해 봅시다. 꼭지점이 8개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 선으로 잇고, 두 개의 색으로 칠해 봅니다. 단, 이 중 한 평면에 있는 점 4개를 어떻게 골라도 그들을 잇는 선 6개가 모두 같은 색이 되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4차원 도형으로 올라가면 어떨까요? 5차원 도형으로는요? 몇 차원까지 올라가야 한 평면에 있는 점 4개를 골랐을 때 그들을 잇는 선 6개가 모두 같은 색이 되는 경우가 반드시 생겨날 수 밖에 없게 될까요?
4차원 이상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수백, 수천 차원 안에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아니더라도 100만 차원을 넘길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문제의 답을 구하다 보면 말도 안 되게 큰 수가 나옵니다.
이 수가 얼마인지 표현하려면 먼저 화살표 표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화살표 표기법은 큰 수를 표현하기 위한 기호입니다. 덧셈을 여러 번 하는 걸 곱셈, 곱셈을 여러 번 하는 걸 거듭제곱으로 나타내듯, 거듭제곱을 여러 번 하는 건 '↑↑'로, '↑↑'를 여러 번 하는 건 '↑↑↑'로, 화살표를 한 개씩 늘려가며 표기합니다.
- 3+3+3+3+3 = 3*5
- 3*3*3*3*3 = 3⁵ = 3↑5
- 3↑3↑3↑3↑3 = 3↑↑5
- 3↑↑3↑↑3↑↑3↑↑3 = 3↑↑↑5
대강 어떤 식인지 감이 오시나요? 화살표가 하나 늘 때마다 값은 빠르게 치솟습니다.
- 3↑3 = 3³ = 27
- 3↑↑3 = 3↑3↑3 = 3↑27 = 3²⁷ = 7,625,597,484,987
- 3↑↑↑3 = 3↑↑3↑↑3 = 3↑↑7,625,597,484,987
위에 보이듯이 3↑↑3만 되어도 7조라는 수가 나와 버리고, 3↑↑↑3은 그냥 계산을 포기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는 표현도 우습습니다. 기하급수는 여기에 비하면 정말 느리게 늘어납니다.
화살표 표기법을 바탕으로, 그레이엄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 g₁ = 3↑↑↑↑3 (화살표 4개)
- g₂ = 3↑(g₁개의 화살표)3
- g₃ = 3↑(g₂개의 화살표)3
- ...
- g₆₄ = 3↑(g₆₃개의 화살표)3
그레이엄수는 g₆₄입니다. 이 수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개수는 대략 10⁸⁰개 정도로 추정됩니다. 구골(10¹⁰⁰)도 이미 우주의 원자 개수보다 훨씬 큽니다. 그렇지만 그레이엄수는 그와 비교도 안 되게 큽니다. 그레이엄수의 각 자릿수를 우주의 원자 하나하나에 적어도 다 적을 수가 없습니다(구골은 1 뒤에 0이 100개 있는 거니까 101자리로 적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주를 몇 개를 가져와도 부족할 것입니다. 사실 우주를 우주의 원자 개수만큼 가져와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큰 수를 얘기할 때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천문학의 천문학을 데리고 와도 그레이엄수의 코딱지만큼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엄수는 앞서 말씀드렸던 문제의 상한값입니다. 즉, 그레이엄수 차원에서는 반드시 같은 색의 선분 6개로 연결된 사각형이 존재합니다. 이 문제의 실제 답은 그레이엄수보다 훨씬 작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값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이 지구를 본다면 '창백한 푸른 점'으로 보인다는 칼 세이건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려주며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짧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조그마한 방 안에서 우주의 우주로도 담지 못할 만큼 큰 수를 상상해내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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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노트
어제 메일로 발송된 버전의 설명에서는 화살표 표기법에 대해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단 판단이 들어 화살표 표기법에 관한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이미 발송된 메일은 수정할 수 없지만, 웹 버전을 통해서라도 보다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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