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식에는, 그 인식이 성립하는 순간의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뿌리를 내린 색깔이 묻어 있어요. 무색투명한 인식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이해라는 것은 없어요.
…어떤 지식체계가 한 사람의 정신 구조에 깊숙이 들어가 있을수록 그것을 허물기는 어렵고 또 커다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되지만, 그렇게 허무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기 시각이란 것이 생겨나지 않거나 얕은 것이 되고 맙니다. 뭔가 하나의 논리체계 속에 쉽게 갇혀 버려서, 밖에서 보면 분명 이상한 것인데도 본인은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말지요.-다치바나 다카시, [사색기행]
이해의 범위에는 끝이 없습니다.
지식도, 문화도, 유행도, 환경도, 사람도, 계속하여 현상은 변화를 맞고 있기에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할지라도 늘 배울 것들로 넘치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특성이 이러하니 자꾸만 내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고, 낯선 일들을 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며, 무언가에 익숙해져 더 이상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는 익숙한 상태에 놓여있길 원하며, 나의 의견이 설득력을 가져 대중 일반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하죠.
애초에 사람들의 생각이란 다 제각각이라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처럼 '일반적인 이해'란 게 없음에도 말입니다.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고,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익숙하고 편안한 상태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얻은 편안함인데, 굳이 그 편안함을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죠.
편안함에서 벗어난다는 건 그만큼의 지식을 얻기 위해 투자해 온 나의 시간, 인내, 기타 치러야만 했던 크고 작은 대가들도 함께 허무는 일이 되는 거니까요.
그렇기에 익숙한 지식을 허문다는 건 생각을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고, 또 허문다 해도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쌓아 올린 지식이 우리를 가둘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만, 지식을 갖는다고 해서 꼭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나만의 관점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그 지식이란 게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지 몰라도, 남들에게는 전혀 아닐 수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죠.
이러한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세상 일반에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며, 각자 의존하고 있는 지식이 다르다면, 우리는 모두 얼마간의 편견을 품은 채 살고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어떤 편견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련하여 다치바나 다카시는 인간의 일생을 '교육 혹은 환경으로 만들어진 편견을 깨부수기 위한 쉼 없는 투쟁'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죠.
물론 일생을 '투쟁'으로 보든 아니든, 선택하는 건 각자의 몫입니다.
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기로 했느냐에 따라 그렇게 살게 될 따름입니다.
만일 지금보다도 더 넓은 세상을 보길 원한다면, 그간 노력한 시간이 어떠하든 나의 지식이 온전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계속하여 내가 부여한 당위성을 부숴나갈 수 있어야 하겠죠.
완벽하게 이해하겠다는 마음까지도 말입니다.
이는 허무로 향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렇게 모든 생각을 다 내려놓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모든 걸 일으키는 원인, 곧 선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내 삶을 중요하게 받쳐준다고 믿었던 지식들로부터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한계란 내가 지운 것일 뿐임을 알게 되고 더 많은 가능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과거에 중요하다고 믿었던 걸 현재도 고수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언제 또 변할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 며칠 후, 혹은 몇 분 후에 달라질지는 모를 일입니다.
모든 선택은 그 무엇도, 누구에게도 아닌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변화를 꿈꾸고 계신가요?
변화해나가는 세상, 변화해나가는 우리,
무한한 흐름 속에 놓인 우리의 삶은 '가능성의 장' 그 자체이며,
우리 모두는 유한한 인식의 틀을 깨뜨려 가능성을 실현해나갈 수 있는 창조적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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