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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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퍼부을수록 세상은 적막했다. 덮고 있는 눈도 무겁고 적막도 무거운데 마음은 자꾸만 눈송이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라 이 세상이 아닌 우주의 어떤 곳, 삶도 죽음도 뛰어넘은, 어쩌면 삶과 죽음이 시작된 어떤 곳에 닿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의 비의 같은 것의 정수에라도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멍 때리면 계절이 변화하는 게 보여요. 굳이 화무십일홍 같은 말을 배우지 않아도 젊으면 시들기 마련이라는 걸 그냥 배우는 거죠.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증이 없어요. 자연은 우울하지 않죠. 때가 되면 변하고 잎을 떨굴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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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쓸모란 무엇일까.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 그 쓸모란 한 가지가 아닐 거다. 지루한 여행의 동반자, 새로운 세계를 다중으로 경험하게 하는 오래된 멀티버스, 다른 이가 되어 보는 놀라운 경험.
책 속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책 속에는 친절한 안내를 도맡는 썩 괜찮은 안내자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소설들은 삶의 굽이굽이마다 작가의 생각과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작은 돌이 되어주었고, 난 그런 소설의 영향력이 바로 소설의 쓸모라고 이해했다.
인생의 불확실성과 미지의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통제력을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공포,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여온 자동 재생되는 편견과 습관을 계속 가동하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의식에 자동 저장된 그 프로그램을 삭제할 때만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설과 삶을 통해 내가 본 그 모습은 생각보다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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