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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 적어 보인다. 누구나 책을 사랑하고, 사랑할 준비는 마쳤다. 내가 고르는 모든 책이 타인도 휘두른 명품일 필요는 없다. 또 만인이 같은 모습으로 휘두른 명품은 이미 명품으로서의 가치가 훼손된 상태다. 내게 알맞은 명품을 찾아내 책장에 꽂아두는 일이 더 긴요하다.
"책읽기의 본질은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지배하는 지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과거의 지식을 담은 모든 책은 당신의 지혜로운 창의력에 의해 죽기 위해 태어났다. 미래는 바로 그 과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독자는 책을 '죽이기 위해' 골라야 한다. 은둔하는 책을 굳이 찾아내 내 안에서 살해하고, 나의 심부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드는 것이 독서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것은 책의 바람직한 운명이자 모든 나의 온전한 해방이 된다.
# 안희연 시인
(새 시집 '당근밭 걷기' 제목에 관해) 제가 생각하는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이행’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일으켜 걸을 때,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함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행은 변화, 다른 상태로의 옮겨감, 거행이자 실천. 그러니 실은 존재를 걸고 행해야 하는 과업인 셈이에요. 이번 시집을 통해 그런 이행으로서의 걷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었고요.
내가 지금 여기, 이러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저 땅에 심긴 당근처럼 들여다보려고 해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도 거기 있음을 바라보기.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절박한 사람은 문장을 붙들게 되어 있어요. 저는 그렇게 당신에게 붙들리는 문장이, 장작처럼 태워져 당신을 데우는 문장이 되고 싶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의 얼굴을 상상하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당신의 당근밭은 어떤 규모, 어떤 모양일까요? 언젠가 우리 만나는 날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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