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5. 비건들 눈치 보던 점심 시간(반전주의)

러쉬 영국 본사에서 일하던 썰 풉니다

2023.10.17 | 조회 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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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국이 어땠냐면

영국에서 워홀 2년, 취업 5년 살며 겪었던 문화충격 및 소소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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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거든. 경제적으로 초조한 한편으로 지금 생활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어. 근데 놀랍게도 이런 내가 영국에 있을 때 5년이나 다닌 회사가 있어... 그건 바로 입욕제로 유명한 영국 회사 'LUSH!' 그곳에서 영상디자이너로 일했었는데 자세한 얘긴 뒤로 하고 오늘은 그곳에서 눈을 뜨게 된 채식문화에 대해 얘기하고자 해!

‘러쉬’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잖아. 심지어 회사 철학 전문 디렉터(Ethics Director)가 있을 정도로 동물과 인권, 환경 보호에 진심이야. 사내 이벤트가 있을 땐 채식 음식만 제공하고 사무실용품은 모두 친환경재를 써. 일할 때 유튜브로 제품 사용법 영상을 자주 만들었거든. 그때 촬영용으로 썼던 화장솜마저 일회용이 아닌 다회용 천을 썼어. 이렇게 신념이 철저하다보니 본사에는 채식하는 직원들이 많았어. 

 

이벤트를 위해 차려진 비건 음식
이벤트를 위해 차려진 비건 음식

 

반면에 나는 러쉬에 입사한 2017년까지만 해도 채식의 ‘ㅊ’도 모르는 상태였어. 매 끼니에 고기가 없으면 어색한 나라 한국에서 왔으니 당연했지...  채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베지테리언(Vegetarian)’은 해산물, 고기를 먹지 않고, ‘비건(Vegan)’은 해산물, 고기뿐만 아니라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방식이야. 여러 이유가 있지만 환경과 동물을 위해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 근데 나는 러쉬 입사 전 2년 동안 런던에 있을 때도 채식하던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어. 채식주의자가 다수인 회사에 오니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어. 

동료 중에는 이미 10년째 비건으로 지낸 이들도 꽤 있었어. 동료들과 얘기하면서 배추 덩어리 김치조차 비건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지 뭐야! 김치에 양념으로 들어가는 멸치액젓을 그저 소스로만 봤지, 멸치가 생선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었거든... 본사에서 흔치 않은 외국인으로서 한국을 소개할 기회가 많았지만, 평소에 자랑스러워하던 한국 음식만은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없었어. 비건들에게 추천할 만한 음식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거든. 머릿속이 하얘질 뿐이었어😨

 

 

런던으로 사무실을 갓 옮겼을 때 네 명의 동료와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어. 네 명 중 한 명은 베지테리안, 세 명은 다 비건이었어. 넷 다 영국 백인으로 채식을 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동양인에 고기를 먹는 날 어떻게 생각할지 자꾸 의식하게 되더라구. 인스타그램에 어떤 비건 동료가 육식을 먹지 말라는 콘텐츠를 올리는 걸 보고 내 어깨는 더 움츠러들어버렸고... 압박감에 못이겨 점심시간에는 혼자 옥상에 가서 도시락을 먹곤 했어. 런던 물가가 워낙 비싸니 집에서 직접 요리하고 도시락을 싸 오는 게 합리적이었거든. 주로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김치볶음밥, 떡볶이, 파스타 같은 음식을 싸 왔는데... 소고기, 어묵, 베이컨 등을 동료들 옆에서 어떻게 먹겠어... 나를 ‘지구를 생각하지 않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여길것만 같아서 점심 때마다 도망갔지. 

6개월 정도 지났을까. 네 명의 동료 중 한 명이었던 릴리가 회사를 떠난다고 하더라구. 근처 펍에서 고별 회식을 했어. 참고로 영국은 회식이라 해도 펍으로 가면 보통 술만 마셔. 영국인들은 술 마실 때 안주를 안 먹거든? 하지만 나는 토박이 한국인으로서, 더 이상 빈 속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어. 여전히 비건 동료들이 신경 쓰였지만, 술을 더 잘 흡수하기 위해 안주를 먹기로 결심했어. 그건 바로.. 과감하게 핫 윙! 응.. 치킨... 거의 처음으로 솔직당당하게 고기를 먹기로 한 거지.

핫 윙이 테이블에 놓이자, 괜히 민망해서 동료들에게 말했어.

“너네 비건인데 내가 닭 먹고 있어서 미안해. 근데 내가 빈 속에 술을 마시면 토해서 음식을 먹어야 하거든. 메뉴에 고를 게 없어서 핫 윙을 시켰어.”

동료들은 괜찮다고 했어. 그런데...술을 마셔서 알딸딸해진 걸까, 떠나니까 속이 시원해진 걸까? 릴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어.

"괜찮아. 나도 전날 저녁에 치킨 먹었어~!"

눈이 번쩍 뜨였어. 

치... 치킨?
치... 치킨?

“뭐라고? 너 비건이잖아. 그런데 저녁에 치킨을 먹었다고?”

알고 보니 릴리는 그동안 비건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거야... 릴리는 러쉬에서 무려 6년 동안 일하고 있었어... 어쩐지... 그 친구는 저렴하면서 비건인 건 컵라면 뿐이라며 점심으로 99p짜리저질 라면을 후루룩 먹곤 했거든. 사실은 저녁에 고기를 먹어서 남은 음식을 도시락으로 싸 오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충격적인 반전에 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쾅쾅 치면서 깔깔 웃었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맨날 옥상 가서 점심 먹었잖아!”

비건 세계에서 남들 눈치를 본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동안 꽉 쥐고 있던 긴장감이 스르륵 풀렸어.

 

 

출처: 마스터쉐프
출처: 마스터쉐프

영국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육식하는 사람들이 다수야.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주류인 러쉬에서 일하면서 식생활에서 육식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심지어 비건 외에도 다양한 식생활을 가진 동료들을 만났어. 나처럼 고기부터 해산물 다 먹는 동료, 해산물까지는 먹는 동료, 밀가루 음식을 못 먹는 동료, 병 때문에 오히려 채소를 못 먹는 동료까지 있었어. 서서히 비건들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어. 세상엔 음식을 먹는 방법이 이토록 많은데 단 하나의 기준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겠더라고!  영국에서 마트에 가면 비건, 글루텐프리 등 다양한 식습관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식품코너가 많아. 레스토랑에는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메뉴도 많고. 이제 단일한 식생활의 시대는 지나가고, 다양한 식생활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해. 집에 초대한 손님 중에 비건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요리할 메뉴를 다시 생각해야 하거든. 하지만 내가 성가시다고 그들의 선택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지.

어느 날 비건인 동료 에밀리아는 내게 말했어.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고기를 먹으면 안 좋게 보고, 그런 사람들에게 채식하라고 설득하고 싶었어. 그런데 이제는 신경 안 써. 나 신경 쓰지 말고 고기 편하게 먹어.”

에밀리아는 내 생일 선물로 아름다운 요리책을 선물했는데 그건 육류요리가 포함된 요리책이었어. 그녀가 날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고마웠었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까다로운 사람’, 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 선택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하고 눈치 보는 습관도 훌훌 털어버리는 게 좋고. 각자의 선택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면 서로 무해하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럼 오늘은 여기서 편지를 마칠게.

아 참참, 이번주 목요일은 사정이 생겨서 쉬어가도록 할게.  미안해 ㅜㅜ 다음주에 다시 만나🩷

 

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수수로부터

 

*본 내용은 영국 러쉬에 한정된 제 경험이며, 러쉬코리아의 회사 문화도 비슷하겠지만 잘 모른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러쉬코리아도 사랑합니다🫶

*등장한 사람들 이름은 가명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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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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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야

    0
    5 months 전

    식습관으로 눈치를 봐야한다는 점은 몰랐던 세계네요!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상인 만큼 육식한다고 야만적이거나 채식한다고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바꾸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해요!

    ㄴ 답글 (1)
  • 하느리

    0
    4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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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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