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와 장수의 염원, 그 화려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민화전> 3.27-6.29

2025.06.02 | 조회 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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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구독자 님, 어느덧 여름의 초입입니다. 봄부터 열린 전시들이 슬슬 끝날 즈음이지요. 상반기 추천 전시로 호암미술관의 <겸재정선>을 먼저 리뷰했는데요. 6월 놓치기 아쉬운 전시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하 APMA)의 <조선민화전>을 추천해봅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 혹은 궁중회화와는 사뭇 다른, 민화의 도식화되면서 모던함이 묻어나는 사물과 풍경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APMA은 이미 여러 번 병풍을 주제로 전시를 선보인 바 있는데요. 이번 전시를 여는 병풍 중에는, 현대에 특별한 이력을 가진 작품이 있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소개하고 싶어요. 디자이너 미카 에르테군(1926-2023)이 소장하고 있었던 이택균 작 「책가도 10폭」으로, APMA에서 소장하게 되어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이전에 이 작품은 각 폭이 분리된 10개의 패널 형식으로 제작되어, 컬렉터의 뉴욕 타운하우스 벽면을 장식했다고 합니다.

세로로 긴 그림이 적게는 2폭, 많게는 12폭까지 나열된 '병풍'의 형태가 현대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요. 거실에 걸린 예를 함께 살펴보니 모던한 거실에 디자인적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내 집에, 또는 내 마음에 걸 그림 한 점을 고른다면 민화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색채도 곱고 화려하고, 좋은 의미도 담뿍 담은 민화 한 점 골라보세요.

© 2024 Christie's Images Limited 
© 2024 Christie's Images Limited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민화전> 전시 입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민화전> 전시 입구

정물

「책거리 12폭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1918
「책거리 12폭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1918
「책거리 12폭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1918
「책거리 12폭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1918

1918년에 그려진 「책거리 12폭 병풍」은 핑크색 등 화사한 색감이 돋보이는 책거리 병풍입니다. 서가 없이 자유롭게 배치된 사물 사이로 시계, 안경 등 다양한 서양식 기물이 등장하는 등 후반기에 그려진 병풍의 미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도식화된 옛 기물과 신문물을 혼합하여 자연스럽게 묘사한 점, 기물마다 그려넣은 섬세한 문양 등에서 작가의 기량이 느껴집니다. 사시사철 핀 화병의 꽃, 싱싱한 포도와 사과 등의 과일, 귀한 다관과 찻잔에 둘러싸인 어느 조선의 방을 상상해봅니다.

「백수백복도 4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19세기 후반
「백수백복도 4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19세기 후반
「백수백복도 4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19세기 후반
「백수백복도 4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19세기 후반

문자도는 좋은 일을 바라는 길상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담은 소재 중 하나입니다. 장수와 다복을 의미하는 수壽와 복福을 빽빽하게 채운 백수백복도가 대표적이죠. 보기만 해도 좋은 일이 가득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작품은 문자 외에도 여러 그림을 세밀하게 묘사해 민화의 장식적 요소와 시각적 즐거움이 돋보입니다. 군데군데 놓인 병이나 잔 형태의 기물이 함께 배치된 구도는 현대 디자인에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는 모던함이 느껴져요. 문자에 인물, 화조, 동물 등의 형상을 덧붙인 것은 한편 작은 그림들을 그려 병풍에 붙인 백납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백납도百納圖와 연관된 또다른 병풍 그림에는 백선도百扇圖가 있습니다. 백선도는 한 화면에 여러 점의 부채를 그려 완성한 병풍입니다. 부채의 면을 마치 캔버스처럼 활용해 산수, 화조, 사군자 등 다양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지런히 놓인 백수백복도나 백납도 속 그림들과 달리, 원이나 부채꼴 등 다양한 형태로 자유롭게 배치되어 현대적인 매력이 느껴집니다. 과장을 좀 더해, 하나하나가 올 여름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라고 해도 될것 같아요.

「백선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서울대학교박물관, 20세기
「백선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서울대학교박물관, 20세기

자연

「금강산칠보산도 10폭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전주역사박물관, 20세기 전반
「금강산칠보산도 10폭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전주역사박물관, 20세기 전반
「금강산도 8폭 병풍」 부분, 종이에 수묵채색, 아모레퍼시픽미술관, 19세기 후반
「금강산도 8폭 병풍」 부분, 종이에 수묵채색, 아모레퍼시픽미술관, 19세기 후반

금강산은 정말 널리 사랑받은 소재인 만큼 민화에서도 많은 작품이 그려졌습니다. 간략화, 도식화가 진행된 풍경인 데도 금강산 풍경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아 감상의 즐거움을 더합니다. 「금강산칠보산도 10폭 병풍」의 1폭과 2폭에는 금강산을 바라보는 단발령, 내금강 입구인 만폭동이 묘사되어 있는데 간단하면서도 지역의 특징이 살아있습니다. 흙산인 단발령에서 바라보는, 암산인 금강산의 모습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그려진 점이 재미있어요.

「금강산도 8폭 병풍」은 거의 현대의 일러스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경물의 묘사가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변형된 것이 특징입니다. 금강산의 암봉들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되어 평면 도형이 첩첩이 쌓인 듯한 도식적인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필선이나 수묵채색에서 느껴지는 모던함, 봉우리의 배치와 구도에서 느껴지는 노련함이 돋보입니다. 봉우리의 부분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요즘 만화책 한 페이지에서 뜯어온 듯, 확장된 세계관인 듯 흥미롭습니다.

「연화도 10폭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호림박물관,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연화도 10폭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호림박물관,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백자청화연화문병·백자청화소병」 경기도자미술관·아모레퍼시픽미술관, 19세기
「백자청화연화문병·백자청화소병」 경기도자미술관·아모레퍼시픽미술관, 19세기

연꽃은 예로부터 군자에 비유되는 상징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길상적 의미가 보다 강조된 소재입니다. 연화도 10폭 병풍에서 물고기와 연꽃이 같이 있으면 연蓮과 어魚가 있는 셈인데요. 이는 한해를 뜻하는 년年, 여유로움을 뜻하는 餘와 발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와 연꽃 그림은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연년유여[年年有餘]를 뜻합니다. 백로 한쌍과 연꽃은 한자로 쓰면 일로연과인데요. 이는 한 길로 쭉 과거에 합격한다[一路連科]는 뜻과 같아 과거 합격을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연꽃과 연밥, 같이 그려진 새는 연생귀자[連生貴子], 연이어 귀한 자식을 낳는다는 의미로 그려졌습니다.

「연화도 10폭 병풍」은 연꽃을 소재로 한 여러 장식 병풍 중에서도 화폭의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딴 연잎과 분홍빛이 도드라지는 연꽃의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입니다. 조선 후기 백자에서도 연꽃과 같은 민화적 소재를 자유롭게 배치한 문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병들은 민화의 소재를 간단하고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이 인상적이에요. 연꽃 뿐 아니라 여러 꽃과 새는 누구나 좋아하는 장식 그림으로 민화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습니다.

「화조도 8폭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국립민속박물관, 19세기 말
「화조도 8폭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국립민속박물관, 19세기 말

서사

「곽분양행락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한양대학교박물관, 19세기
「곽분양행락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한양대학교박물관, 19세기
「곽분양행락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한양대학교박물관, 19세기
「곽분양행락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한양대학교박물관, 19세기

21세기에도 사주팔자를 보러다니는 일이 일상에 남아있는 걸 보면, 우리 삶에는 타고난 팔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나라 명장 곽자의(697-781)는 그런 좋은 팔자를 타고난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지요. 「곽분양행락도 10폭 병풍」에는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곽자의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족들과 성대한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차려진 음식의 화려함, 모인 손님들의 유희 장면이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삼국지연의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20세기
「삼국지연의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20세기
「삼국지연의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20세기
「삼국지연의도 10폭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20세기

조선시대에도 계층 고하를 막론하고 인기가 많았던 '삼국지연의'는 현대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명작이지요. 소설의 장면을 주제로 한 회화도 함께 유행해, 주요한 열 장면을 병풍에 묘사한 「삼국지연의도 10폭 병풍」과 같은 작품이 여럿 전합니다.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모여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 얽어맨 조조의 배를 주유가 화공으로 공격하는 적벽대전 등의 장면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서사의 재미를 더합니다. 

민화의 많은 장면들은 무척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겸손하기보다는 과시와 염원이 느껴지고, 소박하기보다는 화려하고 장식적입니다. 그래서 전시를 둘러보고 난 뒤, 이 마음이 닿아 조금 더 행복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고미술 중 가장 현대에 가깝기에 시각적으로도 요즘의 미감에도 잘 부합한다는 느낌이고요. 같은 아모레퍼시픽 건물의 오설록 및 여러 맛집도, 근처 용리단길도 초여름에 걷기에 꽤 좋은 곳이 많으니 여유가 되신다면 <조선민화전>과 함께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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