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안녕하세요. 오늘도 날이 무척 춥네요.
저는 요즘 몸도 마음도 추워요 :(
할일은 너무 많은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 일들 투성이거든요.
그렇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심기일전 해볼 생각이에요 (빠샤)
그런 의미로 오늘부터는 '그 동네'로 선정한 몇몇 동네의 이야기를 매주 담아 보내드릴 예정이고요. 시작은 '신당동'입니다.
왜 하필이면 신당동이냐고요?
요즘 제 애증의 동네거든요.
역사의 이면을 담고 있어서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은데 이야기를 엮는 게 너무나도 어려운, 반드시 손을 뻗어 쥐고야 싶은 동네랍니다.
이 동네가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는 바아로 이어 설명해드릴게요!
Chapter.1 신당이 많은 동네
신당동하면 떡볶이 먼저 떠올리실 분들이 많으시겠지만요. 사실 신당동은 떡볶이가 떠오르기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는 동네였습니다. 신당동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신당이 많은 동네라서 신당동이라 이름 붙었거든요.
그렇다면, 신당동엔 왜 신당이 많이 생겼을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도성 안팍을 나누던 문들의 세계를 좀 알아야 합니다. 구석구석 세계관이 존재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문이라고 다 같은 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말해야 될 게 있겠네요. 문이 달렸다는 건 안팍이 나뉜다는 얘기겠지요. 18km에 달하는 한양도성의 동, 서, 남, 북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대문입니다. 그리고 사대문의 사이사이로는 백성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네 개의 소문, 사소문이 있었는데요. 조선시대엔 한양도성 안쪽으로 묘를 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으면 성밖에 묫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말일텐데요. 성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무런 문으로나 나갈 수는 없었다고 해요. 동쪽의 작은 문인 '광희문'이 시신이 나갈 수 있는 문이었답니다.
당연히 세상을 떠나 먼길 가는 가족에게 기도라도 한번 해주고 싶고 원한을 풀어주고 싶었겠죠? 광희문 앞에서 무당을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밖에 있어 땅값도 비싸지 않고 무당을 찾는 수요도 많았던 광희문 일대에 무당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신당동 일대였대요.
오늘날에는 신당동에서 점집을 찾기 쉽지 않지만요. 과거엔 무당천이라고 부르는 거리가 있었을 정도로 동네 곳곳에 점집이 있었다고 하고요. 근처에 있는 대장간 거리에서는 다른 대장간과 달리 무당이 사용하는 방울과 무구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서민들의 카운셀러, 무당
무당의 (무)는 巫 이렇게 생겼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라는 뜻이고요. '무당'이라는 말은 '묻는 사람'이라는 어원에서부터 비롯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무당을 생각하면 쫙 찢어진 눈에 진한 화장과 무서운 말투가 떠오르지만요. 사실 무당은 당시 먹고 살기 어렵고 고민이 많았던 사람들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일종의 카운셀러 역할을 했다고 해요.
병원에 무당이 있었다고?
무당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줬다는 건 그들이 활인서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통해 더욱 힘을 얻는 가설이에요. 활인서는 일종의 보건소 같은 장소로, 병에 걸렸으나 갈곳없는 사람들이 머무는 병원이었다고 하는데요. 무녀가 이 병원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의술이 지금 만큼 발달하지 않았었다는 걸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과거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전염병이었던 천연두를 마마라고 불렀고 이 마마를 막기 위해 무당이 굿을 하곤 했다는데요. 이렇듯, 의술을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병, 특히 전염병을 하늘이 노했다거나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무당이 환자들을 수용하던 장소에서 전문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chapter.2 가장 낮은 곳, 빈민들이 몰려살던 동네
신당동을 검색하면 두번째로 많이 뜨는 연관검색어가 있습니다. 생소하고 놀라운 '서울 슬럼가'가 바로 그것인데요. 신당동 빈민의 역사는 활인서에 찾아든 환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치유하던 무녀들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사라져 갔지만,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죠.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낮은 곳에 일본인이 만든 사창가가 생겨나기도 했었고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집을 잃은 사람들까지 이 일대로 몰려들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삶의 장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Chapter.3 서민음식에서 k-food로! 떡볶이의 고향
신당동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 떡볶이도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오늘의 떡볶이 타운 자리엔 떡볶이 좌판이 딱 세개 있었다고 하는데요. 떡볶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름을 두른 판에 간장 양념을 바른 떡을 볶아 팔았다고 해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떡볶이는 '며느리도 몰라'라는 멘트로 유명한 마복림 할머니가 시작했다고 하죠? 이 이야기는 몇 개월 전, 분식 편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
신당동 떡볶이는 여러모로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밀가루로 만든 덕에 저렴한 가격에 사먹을 수 있었고요. 바로 주변에 성동고, 무학여고 등이 있었기 때문에 찾아오기도, 입소문이 나기도 쉬웠죠. 게다가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생활을 가까운 곳에서 할 수 있었으니, 떡볶이 타운의 입구 오늘날 주차장 자리에 동화극장이 있었습니다. 영화보고 떡볶이 먹는 거, 요즘도 친구들 만나면 자주 하지 않나요?
차밍 포인트, 허리케인 박
떡볶이타운이 인기를 끌었던 또 다른 이유는 허리케인 박으로 대표되는 DJ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7080년대에 유행하던 음악다방은 학생들에게 너무도 가고 싶은 미지의 세계였대요. 10대들은 입장할 수 없는 공간이었거든요. 그런데, 신당동 떡볶이 집에서 파격적으로 DJ가 선곡을 해주기 시작한 겁니다! 제가 10대여도 좋았을 것 같아요. 저렴한 가격에 떡볶이도 먹고 좋아하는 노래 들으며 어른 흉내도 내볼 수 있는 그런 곳! 당시 고등학생들이 왜 그리 이곳에 열광했는지 이해가 가네요.
그 당시 인기 DJ였던 허리케인 박의 흔적은 노래 가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
찾아간 곳은 신당동 떡볶이집 떡볶이 한 접시에
라면, 쫄면 없는 돈에 시켜 봤지만
그녀는 좋아하는 떡볶이는 제쳐두고 쳐다본 것은
뮤직박스 안에 DJ라네
공교롭게 가수도 DJ DOC네요! (이 노래를 알려준 윤정님에게 사랑과 박수를...)
오늘은 제가 요즘 푸욱 빠져있는 애증의 동네, 신당동을 담아 보내드렸습니다.
적고 보니 신당동은 살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짠맛이 나는 동네였네요.
저에게 참 매력적이었던 동네, 신당동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부디 흥미로웠길 바랍니다!
다음 번엔 또 다른 동네의 이야기를 담아 인사할게요
그럼 한 주간 건강한 겨울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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