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짱의 영양가 제로 에세이
<곤고한 세계에서 폴카추기>
1. 이 세상이 하도 곤고하여…
지난 전주 영화제 기간 중 있었던 일입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지만 대충 집어던지고 무작정 차를 끌고 전주로 향했습니다. 사실 출발 며칠 전부터 일정이 꽈배기 교차로처럼 배배 꼬였고, 겨우 해낼 정도의 일이 한 시간 주기로 머리를 탁탁 쳐 왔습니다. 그만큼 몰려오는 건 잠이고, 식욕이고, 불길한 마음이었습니다. 당일 아침에 서둘러 짐을 챙기면서도 저는 이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으니.
어릴 적부터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징크스 같은 게 있는데, 대부분 불길한 일을 실컷 예상하고 나면 신기하게 재앙은 예상한 일만 ‘빼고’ 일어난다는 겁니다. 저에게는 전주로 출발하던 날이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전날에 짐을 챙기는 차분함이란 이번엔 없었습니다. 눈물과 자책으로 마감을 겨우 넘기고 쪽잠을 잔 후,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쫓겨나는 사람마냥 짐을 쌌습니다. 언제 들어갔는지, 고양이는 가방 속에 꾸깃꾸깃 몸을 끼워 넣고 있었어요. 자칫 고양이도 전주에 데려갈 뻔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하나 피했네요.
하여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출발하자마자 비는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고, 갑자기 블루투스 연결이 안 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없어 가히 지루함의 충격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디오를 들으면 졸음운전 해버리는 나란 사람) 놀랍게도 고속도로를 타자마자 멀쩡하던 붕붕이는 뭔지 모를 경고등을 반짝 켭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왕소심쟁이인 저는 불안한 마음에 가까운 휴게소를 찾았지만, 빠른 길로 알려주겠다며 저를 현혹한 네이버 네비에 넘어가 결국 식당도 문을 닫은, 편의점만 있는 꼬딱지만 한 휴게소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밥도 못 먹었는데! 비 오는 날은 국밥인데!! 내 호두과자는 흑흑흑
더 최악을 생각했었나 싶지만, 이미 모든 전투력과 의욕은 상실된 지 오래되어 저는 송장 마냥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전화가 또 오네요.
“오늘 정수기 필터 교체 날인데, 어디세요?” / “죄송해요, 죄송해요…”
“몇 시 도착이세요? 감독님이 조금 빨리 보자고…” / “죄송해요… 하아…”
“너 뭐 하고 살길래 엄마한테 전화도 요즘 없고…” / “엄마 나 바뻐 뚝 (뚜뚜뚜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더군요. 저에게 필요한 건 그 누구의 말처럼, 돈은 여유로운 상태로 아무도 날 찾지 않는 한적한 곳에 쳐박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평생 그런 날은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요. 이런 저런 푸념을 내뱉으며 전주에 도착했습니다.
진정한 최악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호스트는 “차 한 대 댈 자리가 있다, 만약 없으면 바로 앞 골목에 있는 꼬깔을 치우고 대면 된다”고 했지만, 좁은 골목 초입부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겨우겨우 건물 앞까지 갔지만, 저기요, 여기 차를 댈 수나 있나요? 지나가지도 못하는데요?
쉬지도, 짐도 풀지 못한 채 영화의 거리로 향했습니다. 다시는 전주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순간이었을거예요.
2. 곤고한 세상에서 폴카 추기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래. 안 가져왔구나. 그것을…. 가방 속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 분명 알아챘어야 했는데, 고양이만 그대로 들어 올려 빼내고는 바로 잠가버린 내 가방. 그렇습니다. 속옷이 없습니다. 수많은 여행 중에도 결코 속옷과 위생 관련 용품만은 빼놓은 적이 없던 내가, 이런 원초적인 실수를 하다니.
우산을 놓고 왔는데 비가 또 옵니다. 그래요, 저는 비를 맞아도 싸요. 이럴꺼면서 차 트렁크에 우산을 두 개씩 가지고 다니는 제가 한심합니다. 처마가 있는 골목으로 휘릭휘릭 다니다보니 저 멀리 란제리 가게가 보입니다. 서둘러 들어가 이것 저것 보고 있었는데,
그때였습니다.
무슨 소리지? 병아리인가?
그러나 고양이와 17년을 살아온 저에게 이 소리는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시뮬레이션됩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카운터로 향했는데, 어머나 세상에, 이런 아이들이 있지 뭐예요.
“오래된 지붕이 무너졌는데 거기서 얘네들이 떨어졌어요. 며칠을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아서 저랑 동네 이웃들이랑 같이 병원 데려가고 밥 먹이고… 일단 데리고 있는 중이에요.”
다양한 턱시도 아가 고양이들을 보니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재작년 무지개다리를 건넌 나의 고양이 장고다르도 딱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데려왔는데…하지만 슬픔은 곧바로 걱정으로 다가옵니다. 이 어린 생명들을 어찌해야 하나… 그리고 난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
한동안 여린 생명들의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무너지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깊은 우울에 허우적거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국가의 큰 재난에 스러진 이들을 위해서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요, 수많은 고통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뭐가 두려워서인지, 혹은 용기가 없는 건지 아니면 게으른 건지 항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저를 스스로 경멸했습니다. 우울이 깊어지니, 몇 년 전부터 슬슬 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지요. 살기 위해 한동안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습니다. 모기영 활동도 잠시 동지들에게 맡겨놓았습니다. 그 당시 모기영 동지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저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아가들의 사진을 찍어 개인 SNS에 올렸습니다. 입양 홍보라기보다는 “이런 아가들을 만났어요”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한편으로 ‘혹시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살짝 기대도 해보았지만 이내 내려놓았습니다. 포스팅 댓글에는 많은 분들이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보러 가고 싶다”, “위치가 어디냐” 등등.
결국 전주에서 만난 지인과 다음 날 냥이들을 보러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그날의 하드코어 일정을 마쳤습니다. 아, 자기 전에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도 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진짜…
다음 날, 모기영 부집행위원장님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습니다.
전화를 끊고 약간 멍하다고 해야 할까, 꿈꾸는 기분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지인은 무슨일이냐고 물었는데 뭔가 설명하기 힘들어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정말 내가 고양이들에게 도움이 된 거야? 그런 거야? 정말로?
예에에에에에!!!! 순간 폭발하는 기쁨에 길거리에서 온 몸으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되지도 않는 스텝을 밟으면서 까지 기뻐하는 제 모습이 웃겼는지, 곁에 있던 지인도 덩달아 손뼉을 짤깍짤깍 쳐주더라고요. 지나가던 사람 몇 명은 흠칫 놀라며 가자미 눈으로 째려봤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그래, 잘 왔네. 전주에 오는 게 맞았어.
“지루박 추는 줄 알았어!”
지인이 한 말 입니다. 지루박이 뭔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저의 스텝은 흡사 폴카와 비슷하더군요. 하여간 그 후로 고양이 이동 대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속옷가게 사장님께 입양할 분과, 입양을 위해 차로 이동해줄 부집행위원장님을 소개하고, 이동 날짜와 필요 물품, 연락처 등을 남겼습니다. 그동안 아가들을 돌봐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이미 차고 넘치는 잠옷을 4벌이나 구매했습니다. (사장님 매상 올려드려야쥬.)
처음엔 파랑이와 분홍이가 입양 예정이었지만, 파랑이의 건강상의 이유로 결국 파랑이는 사장님과아가들을 최초로 구조하신 분이 돌봐주시기로 하였지요.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집행위원장님이 아가들을 데리러 오셨을 때 사장님은 눈물을 보이시고,주변 상인들에게 여기저기 전화하셔서 다들 아가들의 행복을 빌어주셨다고 합니다.
성격 좋은 아가냥들은 다행히 먼 길 이동하는 내내 별탈 없이 잘 와 주었고, 지금은 ‘왕두’와 ‘가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네요.
[모기영 소식] 모기영이 추천하는, 모기영스러운 영화 시리즈 시작
모기영이 추천하는, 모기영스러운 영화 모모영, 그 첫 추천작이 유튜브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앞으로 한달에 한 번 만나는 추천영상을 기대해주세요!
과연 첫 소개작은 어떤 영화일까요?
+ 촬영 현장 비하인드 컷
마무리
다시는 전주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년에 또 가겠지요. 비빔밥도 먹고 콩나물 국밥도 먹어야 하니까요.
뭐 어쩌겠어요. 세상은 하염없이 곤고하고 나는 먼지같이 희미하지만, 그래도 산뜻하게 발 소리를 내는, 톡 탁탁탁, 폴카를 추는 마음으로 살아봐도 괜찮은 것 같아요. (지루박으로 보였다면 죄송) 트롯트와 폴카는 한 끗 차이라고 합니다만, 뭐 상관 없지요.
뭘 어찌하든, 중요한 건 하이-파이 로-파이가 아닌 지금을 향한 진심어린 마음일테니까요.
글 / 장다나
편집디자인 / 모기영 편집부
2025년 5월 31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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