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의 취미와 취향 : 개봉영화 권해드림]
웨스 앤더슨의 <페니키안 스킴>(2025)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세상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차마 미워할 수 없는 괴짜 호텔지배인 구스타브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을 좋아합니다. 영화의 화자이기도 한 호텔보이 출신 제로가 곧바로 덧붙이죠. “그가 바로 희망이었다.” 제가 기억하기로 구스타브는 곧 죽어도 파나쉬 향수는 포기하지 않는 품위 지상주의자였어요. 만화 같고 연극 같은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어쩌다 작품의 주인공이 된 전직 목수 오기가 원작자를 찾아가 따져 묻는 장면도 참 좋아요. “그 대목에서 나는 왜 뜨거운 전기스토브에 손바닥을 올려놓아야 하는 거죠?”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한가?” 이런, 심드렁한 ‘조물주’의 답이라니요. 그에 비하면 오기의 해석은 사랑스럽고도 명쾌합니다. “나는 그녀를 보고 가슴이 빨리 뛰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나보다고 생각했어요.”
올해 칸 경쟁부문에서 6분 30초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웨스 앤더슨의 새 영화 <페니키안 스킴>에도 개인적으로 찌릿한 장면들이 있었어요. 그중 하나는 예정에 없던 재벌 상속녀의 길을 가게 된 애기수녀 리즐(미아 트리플턴)이 아버지 아나톨 자자 코다(베니치오 델토로)에게 기도응답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기도응답 같은 거 받을 줄 몰라요, 그런 척 할 뿐. 그냥 신의 뜻이라고 짐작되는 일을 하는 거죠. 뭐, 알기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듣고 있던 코다가 “아멘.”이라고 했던가요.
그러고 보면 웨스 앤더슨에게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점은 도살장 같고 이해불가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와중에 생사와 선악의 경계를 비틀거리면서라도 나름의 품위를 잃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을 향한 편애인가 싶네요. 그래서 새 영화가 나오면 서둘러 극장에 가야 할 것 같은 팬심이 작동하는 것인가 하고요.
페니키안 스킴이란 가상의 페니키안 공화국에 운하, 터널, 철도, 발전소 등을 복합 설치하는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입니다. 영화는 이 프로젝트의 구상자이자 유럽 최고의 재벌인 자자 코다가 여섯 번째 항공기 테러에서 살아남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게다가 거대 프로젝트를 방해하기 위한 경쟁세력들의 ‘공작’이 실현되면서 자자 코다는 파산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동업자들을 설득해서 함께 고통을 분담하는 것으로 최악의 상황을 돌파해야 하는데요, 이 여행에 외동딸 리즐과 곤충학자인 가정교사 비욘(마이클 세라)과 동행합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녀 중 아홉 아들을 마다하고 리즐을, 그것도 수녀가 되겠다는 딸을 후계자로 불러온 이유가 뭘까요? 저에게는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이기도 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여기서 차마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에 의해 다섯 살 때부터 수녀원에 보내진 리즐은 딱히 재산 욕심도 없고 아버지가 맘에 들지도 않지만 후계자 ‘테스트’에 응하기로 합니다. 어머니 사망의 비밀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죠. 열 자녀의 모친들인 세 아내와 모두 사별한 자자 코다가 아내들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돌고 있었는데요, 코다는 딸에게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엉클 누바(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리즐의 모친과 부적절한 관계였던 그가 비서와의 관계를 의심해서 벌인 일이었을 거라고 말하죠. 다만 여기에 코다가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숨기지 않습니다. 비서가 리즐의 모친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누바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백했어요.
1950년대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이복형제인 누바와 자자 코다의 관계는 다분히 은유적입니다. 냉전시대의 숱한 싸움들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진행중인 세계의 전쟁과 갈등을 향해 웨스 앤더슨은 명분 없는 살상이며 실로 허망한 일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도대체 왜냐고 묻는 코다에게 누바가 되물어요. “알잖아?” “뭔데? 누가 이기고 질지 궁금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한편 리즐이 종신서원을 앞둔 수녀이며 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저승 문 앞에 이르는 임사체험을 한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지닌 여러 종교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 혹은 지옥의 문 앞에서 번번이 귀환하는 코다는 점차 심경에 변화를 겪게 되고 마지막에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원장수녀(호프 데이비스)가 등장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가까워질 때마다 리즐에게는 보석류가 늘어나는데요, 리즐이 원장수녀를 다시 만났을 때 리즐의 묵주는 보석이 주렁주렁한 귀중품으로 바뀌어 있고, 편의점에서 샀다던 호신용 단검 대신 아랍 왕자가 선물한 보석 찬란한 단검을 품고 있으며,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담배 파이프에도 촘촘히 보석이 박혀 있습니다.
원장수녀는 리즐에게 환속을 권하며 이렇게 화려한 세계에 속한 당신은 수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데요, 대신 기부금과 헌금은 계속 받겠다고 하죠. 어린 수녀 하나의 생애를 건 헌신보다 상속녀로서 그가 제공하는 금품이 더 가치 있다는 선언처럼 들려 리즐은 물론 지켜보는 우리도 당황스러운 와중에 눈치 빠른 코다가 갑자기 세례를 받겠다고 말합니다. 혹시 그걸로 부족하면 아홉 생명을 더하겠다고 말이지요. 물론 그의 아홉 아들들 이야기죠.
이 세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과 각자의 문제해결 방식이 너무나 웨스 앤더슨다워서, 무릎을 치며 또 한 번 웃습니다. 실은 웃픈 현실이지만 그걸 그런 방식으로 포착하고 재현해주어 고맙다고나 할까요.
포도주 말고는 독주를 마셔본 적이 없다던 리즐이 위스키를 앞에 두고 아버지와 마주앉아 있을 무렵, 리즐은 다시 소박하고 값싼 재질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지만 테이블의 해골은 여전하고 끈적이는 다정함 없이도 부녀는 평화롭습니다. 아홉 아들 아니고 리즐이어서 다행이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런 거라고 새삼 생각하게 되더랍니다.
참, 리즐 역의 미아 트리플턴이 캐이트 윈슬렛의 딸이라고, 제가 이야기했던가요? 힐다 코다 역의 스칼렛 요한슨과도 분위기가 닮아 보입니다만.^^
소중한 정기후원 감사드립니다 ❤️
* 2025년 5월 1-31일 기준
강나루, 강원중, 강종철, 구귀남, 권명희, 권호경, 길섶교회, 김대현, 김동석, 김미지, 김소혜, 김솔지, 김영준, 김지향, 김진선, 김철회, 김현주, 김혜영, 김희라, 남노영, 대지교회, 문아영, 문형욱, 박성민, 박은영, 박일아, 박재우, 박준형, 박진숙, 박현선, 박현홍, 배재우, 송정훈, 신동주, 신원균, 심에스더, 엄태미, 오늘교회, 유현, 윤선정, 윤영석, 이강희, 이동은, 이범진, 이신석, 이유리, 이정식, 이청자, 이태훈, 이호정, 장다나, 장준호, 정민호, 조하영, 지은실, 채두리, 채송희, 최규창, 최은, 최재용, 한송희, 한유정 님 62명
모기영 후원자들을 위한 시사회 초청 안내
모기영 후원자 님들,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찬란한 내일로>, <플레이 그라운드>, <장기자랑> 등 개봉 전 작품들을 만나보는 모기영 시사회! 올해의 작품은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 입니다.
<3학년 2학기>는 특성화고교 학생들의 현실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29회 부산국제영화제(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 KBS독립영화상) 50회 서울독립영화제(독립스타상, CGK촬영상)등에서 주목받은 작품입니다.
올해 9월 개봉예정이며, 6월 모기영에서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아주아주 ‘모기영스러운’ 영화 입니다 :)
참여링크는 6/9(월) 모기영 후원자 분들 대상으로 1차 발송예정이며, 이후 주간모기영 구독자 분들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모기영이 추천하는 모기영스러운 영화, 모모영.
강신일 위원장님의 모기영스러운 영화 <어 퍼펙트 데이>가 업로드 되었습니다! 한달에 한번 모기영스러운 추천작 소개, 기대해주세요!
아직은 날이 사알짝 - 시원합니다. 이런 날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긴장으로 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돌아오는 주도 모두들 시원, 상큼 하소서!
글 최은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5년 6월 7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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