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우리 손에 쥐여준 희망의 조짐
이런 영화를 좋아합니다. 성취의 환희라든가, 파멸의 비애를 지나치게 과시하지 않는 영화를. 그 강력한 자장에 의지하여 관객의 감정을 영화가 지향하는 어떤 곳으로 이끌고 가려하지 않는 영화를. 성공이나 몰락에 이르기 전,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어떤 조짐, 기미만이 희미하게 사방으로 번지는 영화를. 제 생각에는 <미나리>가 바로 그 지점에 정확히 멈춘 것 같아요. 영화에서 제이콥(스티브 연)이 끝내 무언가를 성취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요. 반대로 몰락의 절벽에서 온 가족이 하강하지도 않습니다. 사려 깊은 이 영화에서 성공과 몰락은 희미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해요. 멈춤은 곧 (기미의) 나아감인데, <미나리>는 이런 식으로 어떤 조짐의 상서로운 기운만이 관객에게 나아가도록 가만히 멈춰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러니 <미나리>에서 특징적인 것은 ‘결을 맺고야 마는’ 고전적인 서사진행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생애의 어느 시점을 통과해온 시간을 떠올리는 방식일 거예요. (정이삭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전적인 경험 80% 이상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고 밝히기도 했죠.) 그렇다면 정이삭 감독의 페르소나 캐릭터는 누구일까요. 제게는 그 인물이 데이빗(앨런 킴)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일까요, 영화는 어리고 섬약한 데이빗의 시선이 투영된 시점쇼트를 자주 보여줍니다.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데이빗은 뒷자리에 앉아 흔들리는 눈빛으로 전방을 응시하는데요. 그 순간 카메라는 데이빗의 눈이 되어 룸미러에 비친 엄마의 모습을 포착해요. 불안한 시선으로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엄마의 모습을요. 영화에서 데이빗의 시점 쇼트는 이것 말고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제가 발견한 것은 이런 지점들에서였어요. 이사 온 곳에서 병원까지 가려면 한참이라는 아빠에게 ‘그러다가 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라 묻는 엄마를 보는 장면이라든지, 데이빗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몸 상태에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집 밖에서 들으며, 창문을 올려다보는 장면이라든지요.
인상적인 것은, 독점적인 시점쇼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데이빗 외에 한 명 더 있다는 점이에요. 순자(윤여정)입니다. 아칸소의 ‘가든 오브 에덴’에 당도한 첫날밤, 제이콥은 이런 요청을 하죠. 우리 가족 모두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자면 좋겠다고요. 이 요청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성취되는데요. 이때 카메라는 거실의 가족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됩니다. 순자가 의자에 걸터앉은 채 가족을 내려다보고 있던 거예요. 그동안 카메라가 데이빗의 시선이 되느라 관객은 이따금씩 무언가를 올려다봤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으로 아주 약간의 부감적인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미나리>의 마지막은 왜 제이콥이나 모니카가 아닌, 순자의 시점이 되어야 했을까요.
그건, 한국에서 미나리를 가져와 낯선 이곳에 심은 사람이 순자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나아가 영화에서 정이삭 감독의 페르소나 캐릭터가 순자에게도 어느 정도의 비중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순자는 데이빗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건넸죠. ‘얘가 날 닮았다는 아이구나.’) 이 영화에서 미나리가 희망을 은유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순자는 우리 가족에게 희망의 씨를 심은 첫 농부인 셈이에요. 이 일은 인간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축복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어서, 순자도 분명한 의도를 갖고 미나리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미나리>는 데이빗의 시선과 순자의 시선 사이를 진자운동 하듯 오가는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점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요.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위치, 혹은 어떤 태도와 같은. 당시의 어린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워 늘 초조했지만(데이빗), 지금의 나는 그때를 어느 정도 관조할 수 있습니다.(순자) 어쩌면 우리는 사는 동안 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주 가까스로 조금 자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직 이른 새벽, 나란히 누운 온 가족이 깊이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는 순자의 표정은 어딘가 초연한 면이 있어요. 영화의 초반부에서 데이빗의 눈빛에 위태로운 감정이 섞여있던 것과는 대비되는 정서입니다. 그녀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무슨 감정이었을까요. 갖은 일이 그녀를 지나쳐가며 얼굴 곳곳으로 움푹 새겨놓은, 마치 인생의 고랑 같은 주름을 숨기지 않으면서 순자는 그저 가족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애처로움, 안쓰러움, 애틋함과 같은 감정들이 저 시선 배면에 묵묵히 배어있을 거라고, 관객은 다만 추측할 따름이에요. 모니카(한예리)와 폴(윌 패튼)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을 지키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어쩌면 신의 응답은 명료한 말의 형식이기보다 어렴풋한 희망의 형식으로 다가오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요. 신은 사람의 손에 희망의 조짐만을 쥐여주지만, 그것을 간직한 사람들은 작고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아직은 막막한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아칸소 농장을 포기할 수 없던 제이콥과 십자가를 짊어진 폴이 그랬듯 말이에요. 제이콥과 폴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모든 것이 허탈하게 불타 없어질 지라도 우리 두 손에 희망의 조짐이 고여있다면, 그 손으로 폐허의 자리에 새로운 미나리를 심을 거예요. 영원히 시작하는 마음으로요.
장프로의 <카페 벨 에포크>(2019)
다니엘 오떼유와 화니 아르당이 주연한 프랑스 영화 <카페 벨 에포크>는 “행복”을 주제로 열렸던 2021년 제3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입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나저나 장프로는 십대 시절에도 참 용맹하고 귀여웠군요.😊
설 연휴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과의 마주침은 망설임과 함께 자주 당혹스러운 순간과 기억을 낳곤 하죠.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드는 만남이라면 ‘사랑하고 품는 쪽으로’ 시선을 두기로 마음먹고 나서
저는 꽤 편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명절의 끝과 함께 찾아온 매서운 추위에 깜짝 놀라고
반갑지 않은 하이 클래스 난방비 고지서에 또 한 번 놀라며,
2023년 첫 달을 이렇게, 고이 보내드립니다.
예년보다 빠른 시기에 명절을 맞았는데,
1월에 설을 지내는 것도 나쁘지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봄이 오기 전에, 오롯이 무언가에 집중할 2월이 ‘통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 이정식, 장다나, 최은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3년 1월 28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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