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불안과 안도 그 어딘가에서
신수원의 <오마주> (2022)
<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그 첫 번째 영화는 신수원 감독의 6번째 작품 <오마주>(2022)입니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 전주대담에서 <여자만세>(신수원, 2011)와 <여판사>(홍은원, 1962)와 함께 선보였던 <오마주>는 개봉 이후 관객이 관객을 불러 모았던 작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만세>는 신수원 감독이 한국 1세대 여성 감독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던 다큐멘터리였고, <여판사>는 박남옥 감독을 이은 국내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의 작품으로 이번에 디지털 복원되어 다시 상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마주>가 주목받은 이유가 역사적인 작품들과의 연관성 때문만은 아닌데요, 신수원 감독이 <여자만세>를 찍으면서 느꼈던 감흥을 바탕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녹여냈기 때문에 다양한 층위로 읽힌다는 지점과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이미지와 서사가 절묘하게 연출한 점 역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영화감독 지완(이정은)은 세 번째 영화를 개봉했지만 제작비도 건지기 힘든 스코어를 이어갑니다. 그 와중에 대학생 아들은 엄마 영화는 재미없다며 애정결핍을 운운하고, 남편(권해효)은 더 이상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며 밥이나 차리라고 야단이죠. 매일 하던 시나리오 수정인데 맞춤법은 왜 아직도 헷갈리는지 우울해하던 어느 날, 지완은 돈은 적지만 의미있는 일을 소개받습니다. 1960년대 활동했던 국내 2번째 여성감독 *홍재원(김호정)의 작품 <여판사> 필름의 사운드를 더빙하는 일을 지완이 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사라지는 것들, 소멸에 대한 불안
차분하고 감정표현이 적은 지완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불안함과 초조함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사그라드는 기억력 앞에서, 영화를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는 PD 앞에서, 꿈꾸는 여자와 살면 외롭다는 남편의 말을 전하는 아들 앞에서, 앞으로 임신계획도 없는데 자궁적출이 손쉽다는 의사 앞에서, 이제는 들리지 않는 옆집 여자의 피아노 소리와 자동차에서 연탄 피우고 목숨을 끊은 신원미상 여성의 죽음 앞에서... 지완의 불안은 더욱 고조되죠. 그것은 사라짐에 대한 불안일 것입니다.
내 기억이, 내 꿈이, 내 직업이, 내 몸이 사그라들고 사라지는 소멸에 대한 불안 말입니다. 그런데 만난 적도 없는 홍재원 감독은 그런 지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정곡을 찌릅니다. 홍재원 감독의 방에서 마주한 그녀의 유작 원고에 쓰여있는 글귀를 통해서 말이죠.
기억, 기록, 흔적
지완은 <여판사>의 손실된 부분의 대본을 찾기 위해 홍재원 감독의 딸을 만나고, 생전에 자주 갔다던 다방도 찾아갑니다. 홍재원 감독과 절친했던 편집기사 옥희(이주실)를 만나기도 하죠. 그렇게 홍재원 감독에 대한 인물들의 기억을 들추고, 흔적을 따라가며 그녀에 대한 기록을 선명히 만들어갑니다. 그녀의 작업일지와 사진, 편지 등을 통해 홍재원감독이 1960년대 홍일점으로 영화계에서 얼마나 소외되었었는지, 또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마음을 지완은 이해하게 되죠. 어쩌면 홍재원 감독의 사무치게 외롭고 고달팠던 흔적들이 지완을 위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지완이 홍재원 감독의 어려움을 읽어내면 읽어낼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요, 그 안타까움은 ‘그렇게나 힘든데 그만두었으면...’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럼에도 끝까지 당신의 일을 했으면...’ 하는 응원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여성 스태프로 일했었던 옥희 기사님이 지완에게 “끝까지 살아남아”라고 지완을 응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불안은 존재의 증거니.
지완은 터무니없이 잘려 나간 필름의 원본을 찾기 위해 곧 문을 닫는 지방 단관극장까지 찾아갑니다. 거기서 유실된 필름 일부를 찾아 영화를 보다 원본에 가깝게 복구하게 되죠. 지완을 통해 복원된 필름이 재상영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당시 사회가 삭제했던 홍재원 감독을 비롯한 그 시대 여성들의 존재와 정신을 되살렸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영화 말미에는 자살한 줄 알았던 옆집 여자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자 지완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함을 넘어 고마움을 표합니다. 누군가의 생존이 이토록 반갑고 고마운 것일 수 있다는 감각이 깊이 인지되는 대목입니다.
빈 몸으로 태어나 무엇하나 쥐지 못하고 떠나는 인간에게 소멸에 대한 불안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불안은 (아직) 소멸하지 않은 존재의 증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불안을 제거할 수 없다면 내 주변 인물들의 존재 자체에 안도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내 안의 불안을 원동력 삼아 어떤 기록과 흔적을 만들기를,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에게 나쁘게 남지 않도록 사는 것이 불안과 안도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 <오마주>는 현재 다양한 OTT에서 감상할 수 있으며, <여판사>는 유튜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무료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국내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여판사>를 연출한 감독은 홍은원이나 극 중 감독이름을 홍재원으로 변경했다. 작품명은 동일하게 사용했다.
[ 모기영 NEWS! ]
📍 모기수다 시즌 2, <퍼스널 쇼퍼>로 즐겁게 OPEN!
관객의 시선으로 영화를 읽고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모임 모기수다, 2023년의 첫 모임을 마을극장 행고재에서 진행했습니다. (1/14 토)
1월에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눈 영화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퍼스널 쇼퍼>입니다. 69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이동진 평론가가 2017년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은 영화이지요. 미스터리 호러라는 장르 속에 인간 존재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다소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함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가득한 영화였어요. 참여한 분들 모두 다음 모임이 너무 기다려진다고 말할 만큼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네요! 아직 참여를 망설이고 계시다면, 2월 모임에 함께해보시는 것 어떨까요?
모기수다 시즌 2의 다음 일정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여러분들이 모기영 곁에 있어주는 것이 진심으로 안도가 된답니다.
모기영에게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께 모기영의 존재가 안도가 될 수 있도록
올 한해도 불안을 원동력 삼아 열심히 뛰어 보겠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 : 박일아 프로그래머
편집디자인 : 강원중
2023.1.21.토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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