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의 취미와 취향 : 모기영, 전주국제영화제 가다!]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콘티넨탈 ‘25>(2025): “불법이 아니면, 괜찮은가”
루마니아 북부 트란실바니아에 사는 헝가리인 오르솔라(에스테르 톰파)는 법집행관입니다. 철거지역의 노숙인을 퇴거시키는 일을 맡고 있는데요, 어느 날 퇴거 집행 도중 노숙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용직 노동자인 그 남자는 호텔이 들어설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 불법거주하고 있었어요. 개발회사 측에 사정해서 퇴거일을 한 달이나 미뤄주기도 하고 이사차량을 준비해주고 사전 통보와 소통에 특별히 신경 써서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오르솔라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큰 충격을 받은 오르솔라는 가족여행도 포기하고 혼자 집에 남아 사건의 늪으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홀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자선단체에 큰돈을 기부하고, 엄마를 찾아가고, 직장상사에게 묻고, 선불교에 심취한 옛 제자의 말을 경청하며, 정교의 성직자와 상담을 합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콘티넨탈 ‘25>는 부조리하고 잔인한 사회에서 선하게 살고 싶은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과 공연한(하지만 이유 있는) 죄책감, 그들이 그 죄책을 다루는 방식을 종교와 선행을 매개로 풀어냈습니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각본상(은곰상) 수상작이며, 전체 영상을 아이폰15로 촬영한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지요.
땅과 거주지, ‘집’은 영화 <콘티넨탈 ‘25>에서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내는 좋은 매개체입니다.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콘티넨탈’은 곧 들어설 초호화 호텔의 이름이에요. 사망한 노숙인은 바로 이 호텔 부지에 있는 건물 지하의 보일러실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요, 이와 대조적으로 중산층 관료인 오르솔라는 마당이 있고 조용하고 쾌적한 교외의 신축 주택단지에 살고 있습니다. 단, 오르솔라는 터전을 빼앗긴다는 것, 그리하여 ‘남의 땅’이 된 고향에 거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루마니아의 헝가리인 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노숙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오르솔라에게 루마니아인 친구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를 보면 죄책감을 느꼈어.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인들의 땅이었는데 1918년에 우리가 빼앗은 거잖아.”
친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간 역사적 사건을 상기한 거였어요. 이 결정으로 트란실바니아의 170만 헝가리인들은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이 됐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뿌리 깊은 갈등이 루마니아와 헝가리인들 사이에 혐오와 배제의 정서를 낳은 것을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숙인이 사망한 일에 관해 루마니아의 언론은 일제히 “헝가리인 법집행관이” 가혹하게 퇴거를 밀어붙였다고 쓰기 시작했거든요. 악플러들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겠지요.
이쯤 되면 오히려 파시즘의 피해자로 나서서 싸울 법도 한데, 오르솔라는 계속해서 고인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내가 뭔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르솔라가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법집행관으로서 당신은 최선을 다했고 할 일을 했을 뿐이므로 ”당신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는데도 말이지요.
오르솔라는 그들에게 매번 절박하게 물어요..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정말 괜찮은 걸까요?“
이어서 노숙인과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대해서도 묻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들을 외면하고 살 수 있는지를.
그녀는 한때 대학에서 법을 가르쳤고 변호사가 될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법집행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한사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며 법망을 피해가고 신뢰를 종잇장만도 못하게 여기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만 줄기차게 보아오던 지난 수개월이 오롯이 떠올라 영화를 보는 내내 오르솔라의 슬픔과 우울이 고맙게 느껴졌어요.
세상은 어쩌면 죄책감의 연대 혹은 연쇄가 살리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세상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끼고 나의 안락함과 특권이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책임의식, 제가 종종 부채의식이라고 부르는 어떤 정서 말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4쪽
전주에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를 달리며 들은 뉴스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의 폭력을 부지런히 전해왔습니다.
러시아의 만행을 고발해온 우크라이나의 여성 기자 빅토리야 로슈치나의 시신이 고문의 흔적으로 심하게 훼손된 채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21세기 고도 문명의 시대,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잔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하며 <콘티넨탈 ‘25>를 곱씹어보았습니다.
마침 라두 주네의 이 영화는 거대한 공룡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공원에서 쓰레기를 줍는 노숙인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요, 산책하던 로봇 개가 노숙인을 위협하고, 무선자동차가 성직자의 걸음을 방해해서 분노를 유발하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마 침묵할 수 없는, 어쩌면 원시 공룡시대부터 시작되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달라진바 전혀 없는 로봇 시대의 폭력에 대해서도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겠지요.
그 와중에 종교는 어떤가요? 길을 막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외쳐대는 사람들의 질문에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미안하고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묻는 이웃을 붙잡고 앉아 선문답을 읊거나 “자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함께 외워보아요.” 하는 것 외에...... 혹시 부끄럽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답이 더 있지 않을까요?
올해도 모기영은 강신일 집행위원장님과 함께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좋은 영화를 찾아 헤매고, 발견한 영화들을 열심히 나누고, 모기영의 존재를 알리느라 잰걸음으로 따순 봄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모기영은 모기영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글 최은
편집 장다나
2025년 5월 3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이번 주간 모기영은 어떠셨나요?
'혐오 대신 도모, 배제 대신 축제'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