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y

초단편 소설

2023.05.11 | 조회 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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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글을 읽기 전에 아래 음악을 먼저 감상하시고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인생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라고, 그 환상의 여정엔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어나다, 곧 저물어갔냐고, 그 희생한 꽃들 대신에 열매는 대신 얼마나 탐스럽게 무르익었냐고 물었다. 인생에서 썩어갈 존재가 될 것인지 무르익은 열매가 될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못다 핀 꽃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괴테의 문장을 읽고 거실로 돌아와 레코드판에 Earth, Wind & Fire의 「Fantasy」를 올렸다. 아니 올리려고 어떤 동작을 취하려다 말았다. 엄밀히 본다면…… 단지 나는 어떤 분위기에 잠시 취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지극히 비유적인 그러니까 하루키적인 풍경에.

물론 내 거실엔 레코드판 같은 유물론을 상징하는 물체는 없다. 있으면 아마도 나는 위의 문장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상상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생각이 낳은 곳엔 환상 따위가 미심쩍게 놓여있을 뿐이다.

내 가슴엔 작은 우주가 하나 있다. 나만의 우주를 상상하면 나는 어떤 종교적 황홀경에 휩싸인다. 언제부터 이 우주적인 존재가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아니 피어났다기보다는 고개를 들려고 내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것은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내 가슴 정중앙, 그러니까 명치 윗부분으로부터 시작해서 등 뒤쪽까지, 마치 반란을 꾀하듯이 앞쪽과 뒤쪽에 관통이라는 생채기를 내버린 것이다. 기묘한 것은 그렇게 작은 터널이 내 몸속에 뚫려서 그 사이로 바람이 오고 가는 사태가 연출됐으나 딱히 내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는 거다. 숨 쉬는 것이든, 혈류가 흐르는 것이든, 위와 대장 사이의 긴밀한 소통이든 생리적으로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나는 고개를 숙여 내 가슴에 나타난 작은 구멍을 관찰하려고 했지만, 빳빳하게 굳어버린 목 근육 탓에, 거울에 비친 구멍을 멀리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낙타가 언젠가 출입하게 될지도 모르는 작은 바늘구멍 같은 것이었다. 혹자는 내 가슴의 구멍을 보고 어쩌면 블랙홀이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며 껄껄 비웃어댔다.

의사는 그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 아니 의학기술로도 판명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으나, 나는 그 의사가 어쩌면 돌팔이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어서 그에게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붙이려다가 참고 뒤돌아섰다. 뒤에서 인턴들이 단체로 웃었다. 나는 천문우주센터에 방문해서 내 가슴에 생긴 이 작은 흔적, 아니 이 구멍의 세계에 천체망원경이라도 들이대고 관찰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분명 그 구멍이 점점 부피를 키우며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점차 커지는 우주인지 구멍인지가 상반신의 30% 이상을 잠식하게 되자, 나는 온갖 망상, 환상, 아니 할루시네이션(환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도 관찰할 수 없는 미시의 세계는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을지 역학의 지배를 받게 될지 밤마다 공상에 빠져서 거의 한숨도 못 드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곤 했다.

그러다 나는 기묘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알약 - 아마도 진정제? - 을 한 알 입에 물고 꿀꺽 삼킨 후 약 두어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 잠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옅은 가수면 상태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 것이었다. 내 눈앞엔 아주 낡은 레코드판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엔 무딘 바늘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진 바람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바늘이 스르르 스스로 움직이더니 레코드판에 살짝 걸쳐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연주가 시작되었다. 바로 Earth, Wind & Fire의 「Fantasy」가!

나는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멜로디에만 끌리는 편이다. 하지만 Fantasy는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하나의 지침서였다. 연주 속에서 보컬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했다.

"네 마음속엔 공간이 하나 있지. 그 속에 무엇을 채울 거야? 거기서 그렇게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하늘에서는 너에게 환한 햇살을 배달해 주겠어? 어떤 선물을 기대하는 거야. 기다리지 말고 당장 환상이라는 우주선에 올라타! 그리고 네 손으로 그 키를 꽉 움켜쥐라고. 꿈은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냐. 너는 지금 우주의 중심에 서 있어. 크게 외치란 말이야. 이건 환상이 아니야. 네 가운데 있는 그것은 네가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란 말이야. 너 스스로를 깨우지 못하면 너는 그 꿈에게 포위되었다가 삼켜지고 말 거야. 꿈이 너를 차지하게 될 거야. 꿈이 너를 집어삼키도록 방치할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장애물을 헤치고 나아가, 하늘이라는 바다에서 유영을 해. 너는 너만의 환상이라는 우주 정거장의 선장이야. 우주라는 광막한 바다의 주인은 너란 말이야.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너는 언젠가 승리하게 될 거야. 목격자가 아닌 주인공으로써 너의 작은 우주와 여행을 떠나봐."

약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다음 날에 속해 있었다. 어제의 나는 환상이 아닌 망상, 그러니까 상실된 상태였고 오늘의 나는 새롭게 발견된 상태였다. 나는 웃옷을 벗어 내 가슴에 난 상처, 아니 구멍을 찾아 더듬었다. 내 손은 가슴 안으로 들어가 등 뒤쪽으로 관통했다. 구멍은 전날보다 훨씬 더 커져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어제 환상에 나타난 Earth, Wind & Fire의 「Fantasy」의 목소리 덕분에 이제 자신감이 더 강해졌다. 나는 실제로 더 강해졌던 것이다.

아마도 그 우주라는 녀석은 이제 내 상체를 거의 차지한 상태일 것이다. 내일이 되면 어쩌면 나는 완벽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내 안의 우주가 더 자라나고 위세를 떨칠수록 나는 내가 바라던 이상의 세계, 궁극의 지점에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라는 믿음을 더 확고하게 새길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 10시에 잠에 들기로 했다. 의사가 처방한 알약을 한꺼번에 10알을 삼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조금 더 긴 잠을, 아니 더 기나긴 환상 속에서 내 여행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10시가 되자, 나는 알약 10알을 한 잔의 따뜻한 물과 함께 삼키곤 침대에 경건하게 누웠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고 편안하게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구멍이 점점 더 검게 물들며 검은색으로 세력을 키워가다, 피식 소리와 함께 마치 성냥개비라서 짧은 생을 다한 것처럼, 한 점으로 자신의 공간을 순식간에 축소해 버렸다. 그러다, 그 작은 점은 티끌이 되어 공중에서 바닥으로 슬슬 나부끼다 공기청정기 사이로 쏙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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