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아주 오래된 친구와 전화를 했다. 내가 연극을 공부했던 대학교 시절부터, 한국으로 돌아가서 힘들어하던 시절, 요가 강사가 된 나, 또 갑자기 뜬금없이 이탈리아에 가겠다는 나를 끝까지 응원하면서 멀고 먼 미국에서 나의 졸업을 축하해주러 피렌체까지 날아와준 친구였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전화였다.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이제 집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친구한테 그 이야기를 하는데,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나는 어디에 있어도 괜찮고 무엇이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누군가 당신은 무엇을 이루었나라고 물어본다면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패션 디렉션을 공부하러 와서 처음에는 유명 패션 하우스에서 일을 경험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것을 이루었나. 아니. 디렉션을 끝까지 공부하고 인턴을 마치기는 했지만, 정말 뜬금없는 시칠리아 와이너리에서 마케팅 인턴을 했다. 패션? 태어나서 처음으로 꼴찌라는 걸 해봤다. 처음으로 내 목표가 낙제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내 목표가 되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넣었고, 또 가족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 얼마나 더 부끄러워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번 한 해는 마치 우주가 작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 시간의 모든 것들을 거두어가버렸다. 가시적으로 무엇을 이루었나. 처음에 가지고 온 목표는커녕 시칠리아 산 위의 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충만하다. 이상하게 내가 원하는 것 중에 이룬 것이 없는데 지금 딱 좋았다. 무언가를 이뤄야 행복할 줄 알았는데, 나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친구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일단 이번 겨울에는 한국에 가야겠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지개는 아무리 좇아가도 잡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무지개 너머를 보려고 달려왔나 보다. 삶은 무지개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었는데 말이다. 삶은 무언가를 이루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었는데, 내가 그걸 보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친구가 말했다.
2년 동안의 시간이 너에게 필요했나 보다. 너의 얘기를 들으니 너무 기쁘다.
나는 무엇이 되어도 괜찮고, 어디에 있어도 괜찮다. 그러니까 당신도 무엇이 되어도 괜찮고, 어디에 있어도 괜찮다. 우리 모두 다 어떤 모양이어도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당신이 그곳에 있다면 그곳의 이야기는 당신의 것이니까. 사실 이 별것 아닌 깨달음을 이렇게 장황하게 쓰고 나니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이제 겨우 한 허물을 벗은 것 같다.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진 것 같다. 이번 생에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할까.
적어도 이번 겨울은 한국에 있어야겠다. 한국에 가서 요가를 가르치고, 일도 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