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23. 마흔 일기 / 친구

안녕, 난 너의 미란다야

2023.07.06 | 조회 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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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남편이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 장에 다녀와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살면서 진짜 친구는 함 들어줄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 같다고. 

저는 아래 글에 쓴 것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하룻밤 재워줄 수 있는 친구 생각을 종종 합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어서요. 집 앞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찜질방에서 자야 했을 때 함께 해준 친구가 두고두고 고맙더라고요. 제 바닥을 보고도 함께 해줘서. 그 일로 저를 판단하지 않아 주어서.

오늘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생각난 김에 오랜 친구들에게 연락도 돌려 보았어요. 구독자님도 이 편지로 소중한 사람들을 떠울릴 수 있길 바랍니다.

 


 

23. 마흔 일기 / 친구

안녕, 난 너의 미란다야

 

 

 

마흔 터널에 진입하며 여전히 흔들리는 내 인생에 선명한 기준 하나가 생겼는데 더 이상 무언가 애쓰면서 살지 않겠다는 거였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이해받기 위해서 하던 모든 것들이 피로해졌다. 그 사람의 저의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숨은 의미를 찾아 최대한 좋은 면을 보려고 하던 모든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되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사실은 착한 사람이라거나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거나 날 몰라서 그런 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사실은 착한 사람이 한 나쁜 말과,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나를 상처 준 행동과, 오래 봐왔지만 여전히 나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무신경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기로 했다.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나에겐 꽤 다정한 손절이었다. 손절 앞에 다정이 붙는 까닭은 일방적으로 인연을 끊은 것은 나였지만 여전히 그 사람의 행복을 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뒤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인 건 진심이었다. 손절한 친구 사이는 남보다 못한 관계로 변하겠지만, 나와의 사이가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그 친구의 삶이 평안히 흐르길, 주변에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그 친구를 지켜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손절한 친구를 딱히 싫어할 이유는 없다. 치를 떨며 헤어질 것도 없었다. 우리가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된 이유는 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바라는 것이 달랐다. 그 친구는 아낌없이 베풀어 준 만큼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랐고, 나는 각자의 삶이 버거울 때는 한발 물러나 기다려 주길 바랐다. 한때는 이해할 수 있었던, 좋아하기까지 했었던 어떤 지점들이 불편해졌다. 그 친구 역시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날벼락, 배신, 못된 년이 준 이해하지 못할 상처일 수 있겠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편해지고 싶어서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 한 사람을 잘라냈다.

 

어쩌면 중년은 친구가 가장 필요한 나이일지 모른다. 아이들도 조금 컸고 혼자만의 시간도 원한다면 제법 가질 수 있는 시기니까. 지내다 보면 사는 게 바빠 소원했던 친구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쉽게 연락하지 못하고 카톡 프로필이 바뀔 때마다 들어가 아이가 이만큼 컸구나, 결혼했구나, 여행을 갔구나 사진 한 컷으로 그들의 요즘을 짐작해 볼 뿐이다.

중년은 친구를 잃기 가장 쉬운 나이기도 하다. 아이는 컸지만 보육이 아닌 교육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아픈 곳은 점점 많아진다. 게다가 나보다 더 빠르게 늙고 있는 부모님의 존재는 짊어질거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짐이 되어 벌써 무겁다. 무엇보다 친구와 나눌 수 없는 슬픔의 존재를 알게 되어 더 그렇다. 한때는 사랑보다 강해 보였던 우정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옅어지고 지워져서 나에게도 그런 게 있었나 가물거린다. 게다가 마흔은 아무리 가까운 친구와도 나눌 수 없는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나이. 친구와 나누기보다 혼자 삭히는 것이 익숙해진 탓에 점점 친구를 찾는 횟수가 줄어든다.

여자들은 결혼할 때 한 번, 아이를 낳을 때 한 번씩 친구를 잃는다. 삶이 크게 휘청할 때마다 인간관계가 정리된다. 친구들이 모두 결혼하고 나 혼자 미혼일 때 거리가 생기고, 모두 아이가 없는데 나 혼자가 갓난아기 키우느라 바빠도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일부러 따돌리는 악의는 없더라도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와 대학으로 나뉜 친구들의 사는 세계가 달라지듯, 교복 입고 손 붙잡고 다니던 그때처럼 매일 같은 풍경을 보며 살지 않으니까 섭섭해도 어쩔 수 없는 수순이리라. 소리 없이 떨어져 나가고 그나마 남아있던 친구마저 데면데면해지기 쉽다. 거기에 돈 문제까지 얽힌다면 더욱 복잡해진다. 마치 언제든 멀어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마흔에게 친구란 가장 필요하면서 가장 잃기 쉬운 사람이다.

이래저래 돌아보니 내 곁에도 남은 친구가 몇 없다. 이제는 멀리 사는 절친한 친구들보다 하원 시간 놀이터에서 동네 엄마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아이의 친구 엄마들이 더 만나기 쉽고, 술을 마셔도 동네 엄마들이 더 가깝다. 가끔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만 카톡 창으로 오랜 친구를 찾을 뿐이다. 우리 대화의 끝은 항상 비슷하다. ‘가까이 살면 같이 술 한잔하면서 얘기할 텐데.’ 다음에는 꼭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답장하지만, 우리에겐 지금 바로 달려갈 수 없는 상황이 있고 (주로 아이들이겠지) 달려가기엔 너무 먼 거리에 산다.

 

물론 어른이 되고 나서 만난 친구도 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더 이상 친구를 사귈 때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거다. 서로가 더 이상 나이를 묻지 않고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만난 친구는 삶의 결이 맞는 경우가 많다. 태도나 취향 같은 것이 비슷해서 애쓰지 않아도 이미 닮아있다. 그래서 편하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조심스럽다. 격의 없이 말하거나 엉망으로 망가져도 되는 사이는 아니다. 집에 놀러 온다고 하면 며칠 동안 안 감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빚쟁이에 쫓기며 빈손으로 찾아가 재워달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건 죽마고우나 가능하다. 서로의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집밥을 얻어먹던 사이. 언니와 동생은 잘 지내는지 안부가 궁금한 사이. 내 성형 전 얼굴을 알고, 방황하던 시기 술 먹고 토하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주던 사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는 지난 세월이 관계를 보증한다. 덕분에 꾸밈이 없다.

어릴 적 친구는 함께 거쳐온 시간 덕분에 결이 다른 어른으로 성장했어도 사회적 위치나 가치관, 외모의 변화 같은 것과 상관없이 만날 때마다 그저 어릴 적 그때의 모습이 된다. 옛 친구는 평생 늙지 않아 보이는 필터와 같다. 마흔이 되어서도 자전거를 타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쉬는 시간에 학교 담을 넘어 컵 떡볶이를 먹던 어릴 적 모습 그대로다.

양희은 님의 에세이 <그러라 그래>에는 “당신의 마음속 나이는 몇 살인가요?” 묻는다면 스물일곱 살이라고 대답하겠다는 문장이 나온다. 아마도 27살이 양희은 님의 인생에서 가장 철없이 아름답게 꽃 피웠던 시기가 아닐까.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그때로 돌아가는 거겠지. 그래서 나에게도 오랜 친구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 친구들이 없으면 나는 영원히 10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중년이 되어도 만날 때마다 10대로 보아주는 그들이 없다면 나는 속절없이 서글퍼질 것 같다.

 

10대를 함께 한동네 친구와의 1막이 끝나고, 20대는 조금 더 넓은 동네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그때 내 삶의 정식적 지주가 되어준 TV 프로그램 중 하나는 '섹스 엔드 더 시티'였다. 아침 일찍 등교하지 않아도 되는 대학생의 시간표는 생각보다 낮에 집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소파에 앉아 하릴없이 TV를 돌리면 올리브 채널에서 어김없이 섹스 엔드 더 시티가 방영 중이었다. 회차 상관없이 틀어주는 대로 보다 팬이 된 나는 DVD를 구입해서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베르사유의 장미에 빠져서 학원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티브이 앞에 앉은 이후로 처음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가 생긴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학 시리즈인 섹스 엔드 더 시티는 뉴욕에 사는 네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근사하게 차려입고 뉴욕 거리를 걷고 낮에는 브런치 카페, 밤에는 핫한 클럽에서 만나, 남자와 섹스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제 막 20대가 된 내 눈에는 뉴욕이, 마놀로 블라닉이(주인공 캐리가 좋아하는 구두 브랜드), 섹스가 진짜 어른의 삶처럼 보였다. 성공한 여성의 전형은 아마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어렴풋이 상상했었다.

하지만 내가 캐리 나이가 되고 나니 그 장면들이 다르게 보인다. 그녀들이 들고 다니던 가방과 신발, 옷, 돈과 명에 그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나와 비교하지 않는데 딱 하나, 그녀들이 여전히 자주 만나는 친구라는 게 무척이나 부러웠다. 특별한 날마다 함께하는 것은 물론, 회사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그 관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니.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녀들은 결혼한 뒤에도(이혼을 한 뒤에도), 이사를 하거나 아이가 생긴 이후에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횟수가 줄어도 여전히 자주 만나서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했다.

 

그녀들이 주인공인 영화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나도 주인공인데. 캐리에게 미란다가, 앤에게는 다이애나가, 로미에게는 제니가, 지우에게는 고우가 있는 것처럼(심지어 지우는 시즌마다 새로운 친구들이 생긴다) 사랑도 모험도 함께 할 친구가 있어야 즐거운 게 인생 아니겠나.

내 인생에서 내가 캐리이자 로미이자 지우인 것처럼, 내가 친근하게 여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내 자리가 미란다이자 제니이자 고우라면 바랄 게 없겠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갈 마흔의 친구들 모두 안녕-

 

 

 

첨부 이미지

 


 

대학때 수업은 잘 안 들었지만 학교 도서관은 열심히 드나들었거든요. 그때 재미를 붙인게 과학과 심리학이었어요. 요즘은 유튜브에서도 심리학에 대해 배울 수 있다니 참 좋은 세상입니다. 

평생 함께 해도 좋은 친구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와닿아서 공유해요. 

또 편지할게요.

23. 7. 6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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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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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2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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