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멘드로, 시스투스. 너 죽고 나 죽자, 동귀어진하는 식물들

"날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날 강하게 만든다."

2025.04.12 | 조회 1.98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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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조목'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일컫는 말입니다. 민간신앙에 대추나무는 양기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벼락까지 맞으면 그 양기가 더욱 강해져서 귀신을 쫓아내는 데 탁월하다 여깁니다. 이런 이유로 벽조목은 인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추나무는 수분이 적은 편이라 벼락 맞을 확률이 적습니다. 벼락이 직접 떨어진 부위는 타버리고, 벼락이 떨어진 부위와 먼 곳은 벼락 맞은 티가 안 나니, 벽조목으로 가치가 있는 부분이 많지도 않습니다. 인기가 많은데 희소하기까지 하니 가격이 올라갑니다.

아무리 가치가 올라간다고 해도 나무 입장에서는 사서 벼락을 맞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미 열대림에는 일부러 벼락을 잘 맞는 쪽으로 진화한 게 아닌가 추측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수관이 매우 넓어 같은 높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번개에 맞을 확률이 최대 68%나 더 높은데, 최대 55m까지 자라 다른 나무들보다 월등히 키가 크기까지 한 '알멘드로' 나무입니다.

알멘드로 나무는 왜 벼락을 잘 맞는 쪽으로 진화했을까요? 우선 알멘드로 나무는 번개를 맞아도 다른 나무들에 비해 내부 조직이 파괴되지 않고 잘 견딥니다. 오히려 번개를 맞으면 이득을 보는데, 알멘드로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식물과 알멘드로 나무와 영양분을 놓고 경쟁하는 주변 나무들이 감전되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알멘드로 나무가 번개에 맞으면 평균 9.2그루의 주변 나무들이 감전됩니다. 알멘드로 나무 주변의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고사할 확률이 48% 높습니다. 이로 인해 알멘드로 나무의 자손 생산 능력이 14배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예측됩니다.

꽃에도 이와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모로코, 포르투갈, 중동 지역 건조한 곳에서 자라는 '시스투스'라고 하는 꽃입니다. 시스투스는 수액의 인화성이 매우 강해서 인화점이 35도에 불과합니다. 지중해의 건조한 여름이 되면 쉽게 불이 붙고 자신을 포함해 주변 식물들이 모두 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시스투스는 타기 전에 내화성이 있는 씨앗을 뿌려놓습니다. 이 씨앗은 부모 시스투스와 주변 식물들이 타고 남은 재를 양분으로 삼아 발아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던가요. 알멘드로와 시스투스는 자신을 죽여가면서까지 이웃을 죽여 살아남는 지독한 식물들입니다. 식물의 세계라고 해서 마냥 순하고 평화롭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더 알아보기

페퍼노트, 대나무는 수십 년에 한 번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온 대나무가 같이 죽습니다.
나무위키, 벽조목
동아사이언스, 번개 맞으면 더 잘사는 나무…"주변 나무 감전시켜 제거"
은근한 잡다한 지식,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 불타 죽는 식물계의 돌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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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ungnam

    0
    3달 전

    시스투스 기름의 인화점은 35~50℃로, 이는 스스로 불타는 온도가 아니라 외부 불꽃이 있어야 점화되는 온도인데, 스스로 자연발화 하려면 약 300도의 온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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