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6시 반, 저는 위급재난문자의 알림음으로 잠에서 깼습니다. 함께 자고 있던 짝꿍과 부랴부랴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대피하였는데요, 30분 뒤 오발령이었다는 안내 문자를 다시 받았습니다. 이른 아침에 깬 게 억울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어제 하루 종일 피곤하기도 하고 또 난데없이 아침 산책을 한 커플이 된 것에 짝꿍과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요, 그래도 다행히 아무 일이 없었으니 '위급 재난에 대해 잘 대처해서 살아 남았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걱정이 됐던 것은 대피하는 동안 저희처럼 대피하는 사람들을 거의 못 봤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짝꿍도 이럴 때 지하철역으로 가는 게 좋다거나 여권을 챙기는 게 좋다는 걸 어제 처음 알게 된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실제로 위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알아두면 좋은 점들을 몇 가지만 모아 보았습니다.
- 미래의 긴급상황에 미리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비해 두자는 이념을 '생존주의'라 합니다. '생존주의'를 키워드로 미리 공부해 두면 도움이 되겠죠? 항상 정답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도움이 되는 우리의 친구 나무위키 링크를 함께 걸어두겠습니다.
- 더불어 이 메일은 나무위키 '전쟁/행동지침' 문서를 많은 부분 참고하였습니다.
- 어제 재난 문자에 대해서 '뭔지는 알려주고 대피하라고 해야지'라고 화나신 분들이 많았는데, 사실 '경계경보'라는 말 안에 약간의 정보는 있습니다. '경계경보'는 적의 공격이 예상 될 때 발표되는 경보입니다.
- 또한 많이 받아보셨을 '긴급재난문자', '안전안내문자' 대신 어제 온 문자는 '위급재난문자'였습니다. '위급재난문자'는 공습경보, 경계경보, 화생방경보 등 전시상황과 규모 6.0 이상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을 경우 등 국가적 위기 상황 발발 시 보내집니다. 긴급재난문자는 지진, 홍수, 산불, 태풍 등 대피가 필요한 상황에, 안전안내문자는 폭염, 황사 등 안전주의를 요할 경우에 보내집니다.
- 혼자 계시기 보단 팀으로 움직이시길 바랍니다.
- 일단은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말고 정치 색과 상관 없이 정부 말에 귀기울입시다. 전쟁은 정부가 합니다. 개개인보다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화재를 막기 위해 가스 등을 잠그고 물이 필요해질 수 있으니 욕조 등에 물을 가득 채웁시다.
- 의외로 라면은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좋은 음식이 아닙니다(물론 없는 것보단 훨씬 좋습니다.). 재난을 대비해 비상 식량을 미리 준비할 거라면 라면보다는 통조림, 육포, 전투식량 등을 알아보세요.
- 통신 기기로는 라디오가 가장 믿음직스럽습니다. 다른 통신 기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에서도 라디오가 마지막까지 역할을 다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황 파악을 위해 챙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 현금, 달러, 금, 은 등의 자산과 중요한 문서나 증명서를 챙깁니다. 주민등록증도 좋지만 여권을 챙겨두면 더욱 좋습니다(둘 다 챙기면 당연히 더 좋습니다.).
- 다음은 대피소 마크입니다. 미리 알아둡시다.
- 전쟁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포격, 폭격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지하에 있는 대피소를 찾는 게 좋습니다. 가까운 지하 주차장, 지하 대형 마트, 지하철역 등을 향합시다. 지하에 있다가 깔릴까 두려워 하실 수 있는데, 그 정도면 어차피 지상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 게다가 모든 지하철역에는 물탱크, 식량 비축 창고, 방독면이 있습니다. 오늘 퇴근길에 무심코 지나쳤던 방독면의 위치를 확인해 보세요. 만에 하나 입구가 막히더라도 지하로는 다른 역들과 이어져 있어 고립의 가능성이 낮습니다.
- 단, 생화학무기 공격 시에는 높은 곳이 유리합니다. 대부분의 가스가 공기보다 무거워 바닥에 깔리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시트'를 보셨다면 주인공이 옥상을 뛰어다니는 장면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 공항, 항구, 주요 도로는 안 가시는 게 좋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다면 이미 통제 중일 것입니다. 게다가 적군의 입장에서 어디를 노리고 포를 쏠지 생각해 본다면, 공항, 항구, 주요 도로는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 만약 대피소에 가지 못했는데 포격이 시작 됐다면 탁자 같은 가구 아래에서 머리를 보호합니다. 귀는 막되 입은 벌립니다. 귀를 막는 것은 고막이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고 입을 벌리는 것은 포격으로 인한 압력 차이를 막기 위함입니다.
- 불안해서 건물 벽에 붙고 싶을 수 있는데, 벽이 무너질 위험은 물론이고 근처에 떨어진 탄에도 충격이 벽을 타고 몸에 전해져 등뼈가 나갈 수 있습니다.
-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체온 유지 없이 3시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 버틸 수 있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당장 가장 필요한 게 뭔지 헷갈린다면 이 '3의 법칙'을 떠올리세요.
- 이 모든 걸 하면서 눈에 띄지 마십시오. 잘 준비해 놓았다고 이목을 끌 경우 범죄의 타겟이 될 수 있습니다.
추가로 확률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만 할까 합니다. 어제처럼 잘못된 경보를 받아보신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이 때문에 경보의 정확도를 의심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보가 아주 정확해도 잘못 울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걱정되는 일이 있는데, 이 일이 일어날 확률이 0.1%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이 일을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경보의 정확도가 99%라고 하겠습니다. 확률적으로, 1만 일 중에 9990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10일은 걱정했던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9990일 중 1%, 즉 100일 정도는 아무 일도 없는데 경보가 잘못 울렸을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10일에는 매우 높은 확률로 10일 모두 경보가 울렸을 것입니다. 즉 1만 일 중 110일 정도가 경보가 울렸고 그 중 100일은 잘못 울린 게 됩니다. 이 때문에 '에이 저 놈의 경보는 맨날 잘못 울려'라고 생각한다면, 99%의 확률로 울리는 정확한 경보를 무시한 채 사고에 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작으면, 잘못 울리는 경보가 많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보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어제 대피하면서 제가 짝꿍에게 한 말은 '정말 큰일이 났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던 것보다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유난 떤 쪽이 낫다'였습니다. 저는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일단 피하고 보지만 그게 진짜 화재였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유난을 떠는 저를 보고 누군가는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쩌다 딱 한 번 제가 맞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제가 누군가를 비웃는 게 비윤리적인 상황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매달 보험금 꼬박꼬박 내고 계신가요? 경보를 듣고 대피하는 것은 돈조차 들지 않습니다. 평화로울 때 위험을 대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