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조건에서 인간이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잠시 보인다는 설정은 매력적입니다. 묘하게 로망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서, '원피스'에 나오는 '기어 세컨드'나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에 나오는 '제로의 영역'처럼, 예나 지금이나 각종 창작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가 특별한 모드로 진입하는 건 창작물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는 오랜 옛날 바다에서 살았던 선조의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딱 들어도 유사과학 같은 이야기지만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짜 인간의 능력, '잠수 반사(Diving reflex)'입니다.
'잠수 반사'는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숨을 참으면 발동합니다. 그냥 물 밖에서 코를 막고 숨을 참을 때에 비해,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숨을 참으면 1.5배 이상 긴 시간 숨을 참을 수 있습니다. 심박도 평소보다 10~25% 정도 낮아지게 됩니다. 동시에 말초혈관수축이 일어납니다. 팔다리와 장기로 가는 혈류가 제한되어 심장, 뇌, 폐 같은 핵심 장기에만 산소가 공급되도록 혈액의 흐름이 재조정됩니다. 비장도 수축하여 저장되어 있던 적혈구를 혈액으로 방출해 산소 운반 능력을 높입니다. 이 모든 변화는 제한된 산소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 더 오래 물 속에 머물 수 있게 해줍니다.
생후 6개월까지의 아기들은 성인보다 훨씬 강한 잠수 반사를 보입니다. 아기를 물에 넣으면 자연스럽게 숨을 참고 수영하는 듯한 동작을 합니다. 잠수 반사 동안 아기의 심박 수는 평균 20% 감소하고, 성대가 닫히면서 기도 위쪽에 들어온 물은 식도로 우회해 위로 들어갑니다. 사실은 아내가 3개월 된 저희 딸을 물에 넣어 실험해 보고 싶어하는데 아직 적당한 기회를 못 만났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 반사는 약해지지만, 지속적으로 잠수하는 사람들에겐 예외인 듯 합니다. 제주도의 해녀들과 동남아시아의 바자우족은 수 세기에 걸쳐 물속에서 생활해온 결과, 일반인보다 훨씬 강한 잠수 반사를 진화시켰습니다. 제주 해녀들은 심박수 저하와 추위 저항성이 뛰어나고, 바자우족은 비장이 더 크고 혈관수축이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의학계에서는 이 원리를 치료에도 활용합니다. 심장 수술 중 의도적으로 체온을 낮춰 뇌를 보호하거나, 심각한 빈맥 환자에게 찬물에 얼굴을 담그게 해 심박수를 조절하는 치료법도 있습니다.
잠수 반사는 인간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포유류에서도 찾을 수 있어서 '포유류 잠수 반사(Mammalian diving reflex)'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개, 돌고래, 고래 같은 바다포유류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데, 물개는 물 밖에서 분당 125회 정도 뛰던 심박이 물 속에서는 10회 정도로까지 떨어진다고 합니다.
다음에 수영을 하거나 세수를 할 때, 잠깐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몸의 변화를 느껴보세요. 구독자 님의 몸에 새겨진 바다의 기억이 살아날 것입니다. 구독자 님은 스스로도 모르게 처음부터 초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 알아보기
Wikipedia, Diving reflex
Wikipedia, Infant swimming
Illado, Mellisa A., et al., Physiological and Genetic Adaptations to Diving in Sea Nomads
Aguilar-Gómez, Diana., et al., Genetic and training adaptations in the Haenyeo divers of Jeju, Korea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