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선 상식으로 여겨지는 지식을 그 지식이 없는 세계에 갖고 가서 그 세계에서 존경을 받는 것은 양산형 판타지의 유명한 클리셰입니다. 나무위키에는 "고기를 뒤집어 굽는다고!? 천재적인 발상이야!"라는 예시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정말 수백 년 전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어쩌면 발전된 지식을 주어도 사람들은 전혀 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괴혈병 예방법을 익혀 온 역사를 본다면 말입니다.
대항해시대에 괴혈병은 아주 골치 아픈 질병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항해를 하다 보면 선원들이 비실대기 시작하는데, 당대 유럽인들은 그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대항해시대동안 최소 2백만 명의 선원들이 괴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괴혈병으로 죽기는커녕 괴혈병에 걸려 봤다는 사람 만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예방법, 치료법이 잘 알려져 있고 그 방법이 무척이나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비타민 C를 먹는 것입니다. 귤만 조금 먹어도 괴혈병에 걸릴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항해시대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려 준다면, 모두가 우리를 칭송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인류가 괴혈병 예방법을 발견하지 못해서 괴혈병을 못 막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일찌감치 괴혈병 예방법을 찾아 놓고도 자꾸 그 방법을 까먹어서 괴혈병으로 고생했습니다.
1400년대 이탈리아 선원들 사이에는 감귤류가 괴혈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탐험을 할 때에도 감귤류의 치료 효과가 이미 알려져 있었고,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에서 돌아오는 배들을 위해 세인트 헬레나에 과일나무와 채소를 심어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식은 자꾸만 소실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비타민 C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나중에 한 번 다뤄보고 싶은 내용인데, 비타민 C를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는 동물은 드뭅니다.). 대신 먹어서 얻은 비타민 C를 몸에 저장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인간은 비타민 C를 한 달 정도는 섭취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습니다. 만약 비타민 C를 안 먹은지 2~3일만 되어도 괴혈병 증상이 나타났더라면 인류는 비타민 C 섭취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달 쯤 지나야 겨우 괴혈병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인류는 비타민 C 결핍이 괴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자꾸 잊었습니다. 주류 의학계는 '소화 불량으로 인한 체내 부패', '조직 내에 고정된 공기 부족' 등 우리가 보기엔 괴상한 이유들로 괴혈병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1536년 자크 카르티에는 북미 원주민들의 지식을 활용해 측백나무 잎으로 차를 끓여 괴혈병을 치료했습니다. 1593년 리처드 호킨스는 괴혈병 예방 수단으로 오렌지와 레몬 주스를 마실 것을 주장했습니다. 1601년 제임스 랭커스터는 배 한 척의 선원들에게는 레몬 주스를 주고 다른 배 세 척의 선원들에게는 레몬 주스를 주지 않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 레몬 주스를 먹지 않은 선원들이 괴혈병에 걸린다는 과학적 결과까지 얻었습니다. 1614년 동인도회사의 외과의사 존 우달은 회사 선박에 타는 견습 외과 의사들을 위한 책에서 신선한 음식을 먹이거나 오렌지, 레몬, 라임, 타마린드 등을 먹이면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1707년에 쓰인 한 가정용 책에는 오렌지 주스를 다른 재료들과 섞어 괴혈병을 예방하는 음료를 만들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1734년 의사 요한 바흐스트롬은 '괴혈병은 신선한 야채를 안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747년 제임스 린드는 임상실험을 통해 다양한 식품들을 비교한 끝에 오렌지와 레몬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라고 밝혔습니다(그러면서도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렇게 수도 없이 괴혈병 예방법이 재발견 됐지만 주류 의학계로부터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위의 예시들 중 1614년 예시는 동인도회사의 외과 의사 존 우달의 발표임에도 불구하고, 존 우달이 선원들에게 알려진 방법을 적었을 뿐이고 의학적으로 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류 의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의학계는 과일을 안 먹어서 병이 생긴다는 것보다는 소화 불량으로 인해 몸 안에서 부패가 일어난다는 게 훨씬 과학적인 설명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신선한 음식과 감귤류가 괴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이라는 사실히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1907년 기니피그를 이용한 실험 이후입니다. 정답을 400년 간 말해 줘도 듣기 싫으면 안 듣는 게 우리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이세계에 가시게 된다면 지식을 알려주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산드라처럼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어주면 힘이 없습니다(반대로 잘못된 지식도 사람들이 믿어버리면 힘이 있습니다.). 지식을 알려주는 것과 함께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이 지식을 받아들일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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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곰탱이
감사합니다 자주 올려달는 부탁은 무리겠지요?
페퍼노트
우선 그만큼 페퍼노트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퍼노트 100회에 밝혔던 바와 같이 100회까지는 주 3회 연재를 원칙으로 해왔고, 이후 주 1회 연재를 원칙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연재를 늘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제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텐데 저 한 사람의 시간과 노력에는 최대치가 있고 가정이나 본업이 페퍼노트에 우선하기 때문에 페퍼노트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오랫동안 많이 가져 가기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후에 페퍼노트로부터 수익 창출이 되고, 그게 제 본업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이 된다면 본업에 들이고 있는 시간을 페퍼노트 연재에 쓸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요원한 이야기입니다. 현재로서는 주 1회 연재가 제 삶을 유지하고 페퍼노트를 지속하는 데 적절한 균형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신 이번에 작성한 괴혈병에 관한 내용이나, 최근 연재한 사제왕 요한의 전설, 궤도 엘리베이터 등에 대한 내용은 모두 페퍼노트 초기부터 생각해 두었던 소재임에도 주 3회 때에는 감히 건드려볼 엄두를 못 냈던 소재인데 주 1회 연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매번 모든 글이 이전보다 나을 수야 없겠지만, 주 1회 연재를 통해 주 3회 때에는 쓸 수 없었던 어려운 글들도 종종 써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퍼노트를 자주 쓰는 것보다도 페퍼노트를 오래 이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금의 저는 믿고 있습니다. 관심과 응원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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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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